‘납품단가 조정신청권’ 제대로 행사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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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사설 ‘납품단가 조정신청권’ 제대로 행사 못했는데… 하도급법에 조정기간·변동률 연동 등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기사입력2017-05-27 08:10

중기이코노미 기자 (junggi@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국정기획자문위원회 박광온 대변인은 26일 공정거래위원회 업무보고 브리핑에서 “하도급 납품가격을 조정할 때 최저임금이 변동될 경우 인건비가 바뀐 부분도 고려하도록 포함시키겠다”고 밝혔다. 하도급거래관계에서 원사업자와 수급업자가 납품단가를 조정할 때 최저임금 인상 등 인건비가 변동된 경우, 이를 납품단가에 반영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현행 하도급법에 따르면, 수급업자는 원재료 가격이 변동된 경우 원사업자에 대해 납품단가 조정을 신청할 수 있다. 공정위가 하도급법을 개정, 납품단가 조정신청권 대상에 원재료 이외 노무비를 포함하도록 하겠다는 방침은 온당한 결정이다. 중소기업계가 줄곧 납품단가 조정대상에 노무비와 경비(전기료 등)를 포함시켜 줄 것을 촉구했고, 이중 일부를 새 정부가 수용했다.

하도급법 개정취지가 공정한 거래관계를 정착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수급인의 권리와 원사업자의 의무를 하도급법에 구체적으로 명시해 원사업자가 탈법을 통해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최소화해야 한다.<이미지 출처=이미지투데이>

하도급법 개정시 직접적인 수혜대상은 하도급거래관계에 있는 수급업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1월 발표한 ‘2016 중소제조업 하도급거래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5년 중소제조업체의 하도급거래 기업비중은 47.3%다. 전체 중소제조업체 중 절반가량이 하도급법 개정에 따른 수혜자인 것이다. 또 원사업자에 대한 납품액 262조원 중 대기업 납품액은 121조원, 전체 납품액의 46.3%를 차지한다. 매출의 절반 수준을 대기업에 의존하는 중소제조업체는 하도급 거래관계에서 ‘을’일 수밖에 없다. 대기업의 부당감액, 제조원가 미반영 등 납품단가 후려치기의 직접적인 피해자다. 하도급 개정으로 재료비를 포함 노무비가 납품단가에 어느 정도 반영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겠지만, 하도급 거래관계 개선을 위해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만은 분명하다.

중기중앙회에 따르면 제조원가는 재료비 50.5%, 노무비 29.9%, 경비 17.9%로 구성된다. 노무비를 납품단가 조정신청 대상에 포함할 경우 수급기업 입장에서 보자면, 원가변동 요인(재료비와 노무비)의 80% 수준은 통제 가능하다. 불가항력 등 외부적인 요인을 배제하고 제조원가 중 80%를 안정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면, 수급업체 입장에선 사업을 지금보다는 더 안정적으로 끌고 갈 수 있다.

전제는 하도급시장에서 수급기업의 ‘갑’인 원사업자가 법을 준수해야 한다. 법은 법일 뿐이고, 현실은 또 다른 논리로 굴러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법과 제도는 성악설(性惡說)을 전제로 설계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 면에서 성선설(性善說)을 기반으로 한 현행 하도급법과 공정위가 추진하는 하도급개정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개연성이 너무 크다. 적정한 수준의 납품단가를 보장해주겠다는 법의 취지와 달리,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 대기업의 불공정거래 관행을 근절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실제 중기중앙회 실태조사를 보면, 현재의 납품단가 수준이 ‘적정하지 않다’는 업체가 10곳 중 4곳 이상이다. 특히 제조원가가 상승한 업체가 52.0%임에도, 납품단가가 인상된 업체는 12.5%에 불과했다(2015년 기준). 2013년 하도급법에 납품단가 조정신청권이 도입된 이후 2년이 지났음에도, 대다수의 업체가 제조원가 인상분을 자체 감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도급법에 따른 납품단가 조정신청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다.

©중기이코노미

하도급법은 수급업체에 납품단가 조정신청권을 부여하면서, 수직종속적인 하도급거래 현실을 고려해 중소기업협동조합에 조정신청권을 위임할 수 있도록 했다. ‘을’의 입장을 감안, 그보다 힘이 센 조합에 신청권을 위임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납품단가 조정협의가 개시되면, 원사업자는 조정신청을 한 ‘진짜’ 당사자, 수급기업을 특정할 수 있다. 수급업체 입장에선 원사업자의 보복조치, 향후 거래관계 단절을 감수하면서까지 납품단가 조정신청권을 행사하지 않는다.

하도급 거래관계에서 원사업자와 수급인이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는 구조는 ‘노동 3권’에 준하는 권리를 수급인에게 부여하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 근로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인 근로자가 사용자와 ‘대등한’ 지위에서 협상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헌법과 노조법에 노동 3권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노동 3권에 준하는 권리를 수급인에게 부여하는 것이 법체계 또는 국민정서에 비춰 어렵다면, 방법은 수급인의 권리와 원사업자의 의무를 하도급법에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있다. 예컨대 매년 최저임금 인상이 확정·고시될 경우 납품단가 조정협의를 일정 기간내에 개시하도록 정할 수 있다. 또 합의가 되지 않을 경우 최저임금 인상률과 납품단가인상률을 연동하는 방안도 있다. 하도급법 개정취지가 공정한 거래관계를 정착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원사업자가 탈법을 통해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최소화해야 한다. 종래 하도급법과 같이 선언적 수준의 제재로는 대기업 독식의 하도급 거래관행을 개선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은 ‘공정한 대한민국’이다. 하도급법 개정을 통한 적정한 납품단가 보장은 시작일 뿐이다. 하도급업체를 포함 모든 중소기업이 생산에 따른 적정한 이윤을 보장받을 수 있을 때, 중소기업의 경영여건이 호전되고 임금지불 여력도 생긴다. 생산시장 불평등과 노동시장 불평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동일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격차를 해소하지 못하면 비정규직의 문제도, 저임금 근로자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새 정부 국정목표인 소득주도의 성장을 안정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하도급법 개정안을 마련할 것을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