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문명의 역전 ‘종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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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중국을 읽다 동서 문명의 역전 ‘종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동양과 서양의 문명사에 획을 가른 종이의 역할과 작용

기사입력2021-09-19 10:00

문승용 객원 기자 (msy9769@nate.com) ㅣ다른기사보기

문승용 박사(중국 문학, 한국외대 중국연구소 연구원)

진시황제를 폭군으로 인식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인 분서(焚書)가 책을 불태운 것이라고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종이로 된 책을 태운 것은 아니다. 종이는 시황제 시절보다 300년이나 뒤인 후한(後漢) 시기 환관이었던 채륜(蔡倫, 61년~121년)이 발명한 것이다. 시황제 때에 불탄 책은 종이가 아니라 대개 비단이나 대나무 또는 나무로 만든 책이라고 보아야 한다.

비단에 쓰여진 것을 백서(帛書), 대나무에 쓰여진 것을 죽간(竹簡), 나무에 쓰여진 것을 목간(木簡)이라고 한다. 당시 비단은 가격이 매우 비쌌기 때문에 백서는 왕실이나 귀족들이 썼던 것이고 일반적으로는 죽간이나 목간을 주로 썼는데, 그나마 대나무가 가볍고 잘 썩지 않아서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종이 대용으로 죽간을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죽간은 대나무의 마디를 잘라낸 다음 마디 사이의 부분을 얇고 가느다랗게 쪼갠 것이다. 벌레 먹는 것을 방지하고 글자가 잘 쓰여지게 하기 위해서 겉면을 불에 쬐어 기름을 빼면 대나무 표면의 파란색이 누렇게 변하는데, 이처럼 파란색을 없애는 과정을 살청(殺靑)이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파란색의 역사’라는 뜻인 청사(靑史)에 길이 남을 업적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이유는 본래 가공하기 이전 파란색의 대나무에 역사를 기록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공한 여러 쪼가리의 죽간에 글을 쓴 다음 가죽끈으로 엮어 보관하는데, 이것의 한 모서리 부분을 따서 그린 것이 冊(책)이라는 글자다. 그러니까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의 책은 오늘날과 같이 여러 장의 종이를 한 묶음으로 제본한 것이 아니라 마치 김밥을 말 때 쓰는 발이 기다랗게 이어진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평소에는 둘둘 말아 쌓아서 책장에 보관하였기 때문에 ‘두루마리 권(卷)’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오늘날 책을 샐 때 ‘한 책, 두 책’ 또는 ‘한 권, 두 권’이라고 해 ‘책’이나 ‘권’을 책 세는 단위로 쓰지만 ‘책’과 ‘권’은 본래 한 페이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대나무 쪼가리를 엮어서 글씨를 쓰던 죽간(竹簡)이다. 대나무는 비교적 가볍고 보존이 잘 되어서 2000년 전에 쓰던 유물이 지금도 종종 발견되고 있는데, 사진에는 죽간을 서로 엮었던 가죽은 이미 썩어서 없어졌다. <사진제공=문승용 박사>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편에는 공자가 주역(周易)을 열심히 읽느라 가죽끈으로 묶은 책이 3번이나 끊어질 정도였다고 해서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을 두고 참으로 열심히 공부한다는 의미로 위편삼절이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오늘날과 같이 종이로 된 책을 가죽끈으로 제본한 것이 끊어질 정도라면 책을 읽느라 참으로 자주 들추어 보아서 가죽끈이 낡아 끊어진 것이라고 여길 수 있겠지만, 공자 시대의 책은 모서리가 날카로운 죽간을 묶어 엮은 것이기 때문에 말고 펴면서 그때마다 죽간 모서리에 닿은 가죽끈이 손상을 입어 자주 끊어졌던 것이다. 그러니까 위편삼절이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책을 자주 들춰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흔히 남자라면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뜻으로 ‘남아수독오거서(男兒需讀五車書)’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책 읽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 이 말을 들으면 왠지 기가 죽곤 한다. 그러나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죽간으로 된 책의 다섯 수레 정도라면 그다지 많은 분량은 아니다.

실제로 남아수독오거서라는 말이 당(唐)나라 때 두보(杜甫)의 제백학사모옥(題柏學士茅屋)이라는 시에서 쓴 말이기는 한데, 종이를 일상적으로 쓰던 당시에도 붓으로 글자를 크게 써야 했기 때문에 책 한 권이라고 해 봐야 그다지 많은 분량이 아니다. 그런 것을 보면 오늘날에는 교육이 대중화되고 책이나 SNS 등 읽을거리가 워낙 많아서 그것들을 읽느라 오히려 가만히 사색하는 시간이 너무 적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 종이 즉, 페이퍼(paper)의 기원을 이집트의 파피루스(papyrus)라고 여기지만, 파피루스는 고대 이집트 나일강 상류에 자라던 갈대 같은 것의 줄기를 가늘게 갈라 가로 세로로 엮은 것을 두들기고 말린 다음 검은색 잉크로 글씨를 썼던 것으로 중국에서 가공하여 썼던 종이와는 성격이 다르니 종이의 원류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파피루스는 제작비가 워낙 비싸서 당시 이집트에서는 왕만이 통치를 위해 사용했을 뿐이다.

종이를 발명했다고 알려진 기원전 2세기 후한(後漢)대 환관인 채륜(蔡倫)의 흉상이다. 하남성 안양(安陽) 문자박물관(文字博物館)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제공=문승용 박사>

이후 유럽에서는 중세 때 중국의 종이 만드는 기술이 전해지기 전까지 종이 대용으로 양의 가죽을 벗겨서 가공한 양피지(羊皮紙)를 사용했다. 양피지 역시 가공하는 일이 번잡한 데다가 가격도 비쌌기 때문에 일찍이 중국이나 우리나라처럼 종이에 간편하게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이처럼 글쓰기를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유럽의 중세가 암흑기였다고 평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실제로 15세기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해 성경(聖經)을 인쇄하였는데, 이때에도 300마리 분의 양피지에 인쇄해야만 했다.

유럽이 근대 산업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당시 금속활자 인쇄술이 발명되고 마침 중국으로부터 종이 만드는 법이 전해졌기 때문에 과학기술이 간편하게 종이에 인쇄되어 전파되면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종이 만드는 기술이 유럽에 건너가서는 유럽을 근대 산업사회로 이끄는 중요한 작용을 했는데, 중국에서는 일찍이 2세기 때 종이를 발명해 일상에서 간편하게 글을 썼고, 11세기 송(宋)나라 때에는 활자 인쇄술을 개발해 대량 인쇄가 가능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어째서 유럽처럼 종이와 활자 인쇄술을 이용해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데에 활용하지 못했던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종이와 관련해 말하자면,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로 말미암아 지식인이나 관리들을 우대하고 기술자나 상인들을 천시하였는데, 글을 쓸 줄 아는 이들은 시나 문장을 쓰는 것에 열중해 권력을 얻고 왕실에서는 종이로 된 온갖 문서를 이용해서 왕조의 지배질서를 공고히 했다. 반면에 기술자들은 글을 몰랐기 때문에 그나마 중국이 이미 보유하고 있었던 제지술, 화약, 나침반, 인쇄술 등 과학기술을 많은 기술자들에게 보급해 더욱 발전시키고 산업화하는 데에 종이를 활용할 수 없었다.

지식과 정보의 대중화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오늘날 종이의 사용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15세기 동서 문명이 역전하는 데에 큰 작용을 하였던 종이가 앞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또 어떤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게 될지 궁금하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한국외대 중국연구소 문승용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