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 들어온 은밀한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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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전시장에 들어온 은밀한 사생활 트레이시 에민, 투박하지만 진솔한 자기고백적 작업

기사입력2016-11-21 13:47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빈 보드카병,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인 재떨이, 사용한 콘돔, 벗겨 던져진 스타킹, 구겨진 화장지, 입었던 속옷, 겨울 슬리퍼…헝클어진 침대. 정돈되지 않은 침대가 너저분한 잡동사니와 함께 지금 영국 테이트 미술관의 분관인 테이트 리버풀(Tate Liverpool)에서 전시되고 있다. 2017년 9월3일까지 ‘Tracey Emin and William Blake in Focus’라는 제목으로 전시될 예정이다.

트레이시 에민 <나의 침대> 1998, 매트리스,리넨, 베개 등

그런데 이 너저분한 침대와 잡동사니의 가격이 무려 254만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41억6000만원이다. 누군가 나뒹군 흔적이 역력한 침대가 40억원이 넘는다니…. 이 침대와 잡동사니는 사실 1999년 영국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터너상의 후보 작품으로 전시되었을 때도 화제였다.

벌써 17년 전에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논쟁을 불어온 이 너저분한 침대가 다시 매스미디어에 떠오른 건 지난해 3월31일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 미술관에 재전시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독일 기업인 크리스티안 뒤르카임(Christian Duerckheim)이 2014년 크리스티 런던 경매에서 이 헝클어진 침대와 잡동사니를 254만파운드에 구매한 후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 장기 대여해주었기에 가능했다. 바로 <나의 침대> 말이다.

1999년 전시장에 들어온 ‘나의 침대’, 나의 은밀한 사생활

현재 무려 40억원이 넘는 <나의 침대(My Bed)>(1998)는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의 작품이다. 사생활이 고스란히 담긴 자신의 침대를 전시장에 그대로 옮겨 놓은 이 작품은 1999년 터너상을 수상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상작보다 더 뜨거운 화제와 논쟁을 만들어내며 미술 스캔들에 길이 남는 작품이 되었다.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전시해 ‘기성품(ready-made)’을 예술의 반열에 올렸다면, 에민은 침대를 전시해 ‘은밀한 사생활’을 예술로 만든 것이다.

‘침대 퍼포먼스 사건’ 1999

이 때문에 <나의 침대>는 “훌륭하다”와 “역겹다”는 상반된 평가를 불러오며 예술의 개념에 대한 논쟁에 불을 지폈다. 이러한 분위기는 불법적인 난동 퍼포먼스 때문에 더욱 활활 타올랐다. 두 명의 중국인 행위예술가가 옷을 벗어던지고 15분간 전시된 <나의 침대>에서 뛰며 베개 싸움을 벌인 것이다. ‘진짜를 위한 광기(Mad for real)’라고 자신들을 부르는 이들은 이 퍼포먼스를 <트레이시의 침대에 뛰어든 벌거벗은 두 남자(Two naked men jump into Tracey's bed)>라고 명명했다. <나의 침대>는 이 불법적 퍼포먼스로 인해 언론과 대중의 집중적 관심을 받았으며, 중국인 행위예술가들 또한 더불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이 ‘침대 퍼포먼스 사건’은 <나의 침대>를 조롱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행위예술가들이 “아직 덜된 작품을 마무리 지어주겠다”라고 에민의 침대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나의 침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혹평이나 불법적 퍼포먼스 등과 같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 그 한 형태로 ‘스터키스트(The Stuckiest)’의 풍자 포스터도 있었다. 붉은 팬티와 그것을 감정(?)하는 테이트 미술관 총관장 니콜라스 세로타의 모습, 그리고 “이거 진짜(2억원짜리) 에민의 작품이야? 아니면 싸구려 가짜?”라는 말풍선이 그려진 이 포스터는 팬티의 가격 감정을 빗대어 <나의 침대>의 미술적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이 포스터가 단지 에민의 침대 작품만을 희화화하기 위해 제작된 것은 아니다. 포스터를 만든 스터키스트는 1999년 출범한 대표적인 터너상 안티 그룹으로, 터너상 시상식이 열릴 때마다 시상식장인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분장으로 조롱하는 ‘스터키스트 데모’로 유명한 단체이기에, 이 포스터는 터너상에 대한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했다.

<나의 침대>는 1999년 터너상 후보 전시에서 문제작으로 떠오르고, 2000년에 컬렉터계의 거물인 찰스 사치에게 15만파운드(약 2억6000만원)에 판매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더불어 트레이시 에민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이후 그녀는 새로운 작품을 전시할 때마다 “머리가 나빠서 개념이 안 서는 개념미술 작가”라던지, “해도 해도 너무 한다” 등의 혹평 속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에민의 작품 구입을 희화화한 작품, 스터키스트 그룹의 찰스 톰슨이 그림(Photo Stuckism.com)

2007년 로열 아카데미회원으로 추대되었고, 같은 해에 52회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 대표작가로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2013년에는 대영 제국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에민의 명성을 끌어올리는데 발판이 된 <나의 침대>는 2014년 경매에 등장하여 2000년 찰스 사치가 구매했던 가격보다 17배가 높은 가격에 낙찰되어 작가의 은밀한 과거 사생활을 담은 타임캡슐로 대중 곁에 돌아왔다.

‘고백의 여왕’의 아픈 상처

트레이시 에민이 미술계에서 두각을 보인 것은 <나의 침대>가 터너상 후보 전시에서 뜨거운 화제와 논쟁을 몰고 오기 2년 전인 1997년이다. 그녀는 1997년 ‘센세이션’ 전시에서 <나와 함께 잤던 모든 사람들 1963~1995>이라는 작품을 선보이면서 미술계에 주목을 받았고, 같은 해 지상파 방송인 ‘채널 4’에서 진행한 평론가들과의 좌담회를 통해 대중과 언론에 그녀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특히 좌담회가 주효했는데, 생방송으로 전국에 방영되고 있는 좌담회에서 그녀는 술에 만취해 출현, 욕설을 퍼붓고 중간에 벌떡 일어나 퇴장하는 역사적인 방송사고를 냈기 때문이다. 에민은 정작 자신이 일으킨 방송사고를 다음날 남자 친구와 아침을 먹으면서 가디언 기사를 읽다가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선정적으로 볼 수 있는 자신과 함께 잤던 사람들을 소재로 한 작업이나, 술 취해 방송에 나와 욕설을 하고 무단 퇴장하는 모습 등은 그녀를 문란하고 과격한 문제아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녀의 일생을 조금만 살펴보면 그녀와 그녀의 작품을 가볍게 보아 넘기기 힘들다. 에민은 터키 출신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의 불륜관계에서 태어났으며, 7세 때 부모의 사업 실패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어린 시절 그녀는 어머니의 애인에 의해 수차례 성학대를 당했고, 13세 때는 동네 청소년들에게 집단성폭행을 당했다. 그때 그녀는 가출했고, 이후 두 번의 낙태와 한 번의 유산을 경험하였다. 이로 인해 심한 우울증을 겪었고 음주와 흡연에 젖어서 살았으며 자살도 시도했다. 이렇게 좋지 못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에민이 예술을 시작한 것은 불운한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에민의 작품을 단순히 관음증을 불러일으키는 말초적 작품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는 자신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그녀를 세간에 알린 <나와 함께 잤던 모든 사람들 1963~1995(Everyone I have Ever Slept With 1963~1995)>(1995)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텐트 안에 102명의 사람 이름이 적혀 있는 아플리케(appliqué) 작품으로, ‘나와 함께 잤던’이란 제목의 문구 때문에 102명의 남자들과 행한 성적 편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트레이시 에민 <나와 함께 잤던 모든 사람 1963~1995>1995, 텐트에 아플리케, 매트리스 등

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이름 중 옛날 남자 친구도 있지만, 가족과 유산된 태아, 할머니, 친구 등도 있어 삶을 함께 나눈 모든 이에 대한 인간적 친밀함을 성찰하는 작품으로 평가하는 것이 정당해 보인다. 이 작품은 찰스 사치가 4만파운드(약 8000만원)에 구매해서 소장하고 있었으나, 2004년 모마트 수장고(Momart art warehouse)의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이제는 사진으로 밖에 볼 수 없게 되었다. 찰스 사치가 에민에게 다시 제작해줄 것을 의뢰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고백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에민은 현재도 자기 고백적 작업을 여러 방식으로 선보이고 있다. 이제 그녀의 나이도 50대 중반을 향해 간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사생활은 현재 세련되고 미끈한 형태의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만들어진 고백조의 문장으로 전시된다. 더 이상 날 것 그대로 전시장에 놓이지 않는다. 투박하지만 진솔하게 드러난 그녀의 은밀한 사생활을 이제 더 이상 전시장에서 보기 힘들 것 같다. 그 때문에 <나의 침대>의 가치는 더욱 더 높은 것이다.[안진국 미술평론가, 종합인문주의 정치비평지 ‘말과활’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