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가지·꽃을 통해 공존의 의미 유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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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마른 가지·꽃을 통해 공존의 의미 유추하다 [그림을 읽다:Artist] <63>하은영 작가

기사입력2017-01-08 09:05

이유미 객원 기자 (kissgallery@naver.com) ㅣ다른기사보기

나팔꽃이 있는 들판 110cmx60cm 장지에 선묘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지켜보는 일은 문학작품을 읽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우리는 문학작품을 통해 세상의 본질을 훔쳐 본 시인의 고통을 함께 하기도 하고 촌철살인과도 같은 단편소설의 위트와 반전의 결말에 경탄하기도 한다. 한편 대하소설의 유장한 호흡에 동참하여 흘러간 역사적 대사건에 묻힌 민초들의 신산한 삶을 느껴볼 수도 있고 역사와 인간을 꿰뚫는 예리한 해석에 동감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한결같은 호흡으로 자신과 주변을 묘사하고 표현하여 결국은 ‘인생은 무엇인가,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궁극적 물음을 되뇌게 하는 밀도 있는 작품을 보기도 한다.

‘꽃을 그리는 작가’로 알려진 하은영은 이번에도 꽃을 중심으로 한 여러 작품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여러 문학작품 가운데 가장 나중의 범주에 속한다. 오랜 시간동안 작가의 시야에 비친 매화, 모란, 동백, 복사꽃, 장미, 라일락에서 개망초, 강아지풀, 개여뀌 등에 이르는 다양한 꽃과 풀들이 작가의 손길에 따라 당당한 주인공이 되어 화면에 등장한다.

동백꽃을 담다 63cmx90cm 장지에 선묘채색 2016

어떤 경우에는 수줍게 돌아선 누드와도 같은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그려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자신의 모습을 분명한 형태와 뚜렷한 색으로 드러낸다. 성장(盛裝)한 신랑과 신부가 자신들의 결혼식에서 하객들에게 멋진 모습을 과시하는 것처럼 충분히 매혹적이다. 마치 생물도감을 옮겨 놓은 것과 같이 철저한 관찰에 의해 이루어진 정확한 묘사와 섬세한 재현은 작가의 성실함의 반영이다.

근작에서는 기존의 꽃에 백자가 추가되었다. 흔히 달항아리라 불리는 백자호를 정면에 배치하여 다양한 형태와 다채로운 색감의 꽃과 절묘한 대비를 이루게 하는 방식은 백자와 꽃의 물성을 배가시켰다. 백자와 꽃은 정물이지만 하은영의 화면에서는 백자와 꽃이 정과 동의 이미지를 화면에 구현하는 듯한 효과를 이루었다. 예전 작품에서도 조금씩 보이던 실험성이 이젠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잡았음은 물론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는 점에 찬사를 보낸다.(중략)

작가는 작업노트에 이렇게 썼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른 나뭇가지도 그 속에 법칙이 있고 질서가 있다. 그런 것들이 세상에 있는 한 외롭지 않을 것이다. 함께 살아가고 있으므로. 마른 꽃이 사람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재현이 아니고 창조인 것이다. 그것이 예술인 것이다.”

하은영 작가가 꾸준히 꽃을 그리는 이유와 의도가 이 두 구절에 집약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짧은 문장이지만 작가는 마른 나뭇가지, 마른 꽃을 통해 자연의 법칙과 질서를 찾아내고 공존의 의미, 예술의 방향까지 유추해냈다. 테크닉에만 의존하는 기능인을 넘어 시인의 가슴을 지녔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복사꽃을 담다 63cmx90cm 장지에 선묘채색 2016

작가는 작업노트의 다른 구절에서 “1년 365일 매일 식물을 채집하여 그리는 작업, 곧 그 날의 마음과 생각을 그림으로 쓰는 일기”라는 작업에 착수했음을 밝혔다. 우리가 쉽게 일기라고 부르는 방식으로 작가는 자신의 세계를 기록하고 또 표현하려는 것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주변사물을 작품화하는 작가의 행보와 어울리는 작업방향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적 관념은 예술과 그 사람을 동일시한다. 이러한 사상의 반영이 “글씨가 곧 그 사람(書如其人)”이라는 표현이다. 글씨는 동아시아 예술의 기본이니 여기에서 글씨는 단순한 글씨가 아닌 예술 전체를 지칭한다. 곧 그 예술이 작가이다.

작가가 작업노트에 쓴 “작가에게 붓은 무사의 칼과 같다”는 표현은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구절이 아니다. 평생을 노력하여 일가를 이뤄낸 장인만이 그런 문구를 사용할 자격이 있다. 얼핏 지루하고 반복적일 수 있는 꽃이라는 대상을 오랜 세월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마음가짐 때문이었나 보다.

사실 꽃만을 그리는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또 세월이 지나면 어떤 방식으로 변화될까 궁금했었다. 그런데 작가는 슬기롭게 자신의 방식을 찾아내고 또 높은 완성도와 함께 뛰어난 성취를 이룩했다. 이제 새로운 경지를 향해 정진해 가는 작가에게 축하와 함께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작가의 바람대로 “희망을 주는 그림”이 이루어지길 바랄 따름이다.(김상엽 평론 중 발췌)[정리=키스갤러리 이유미 아트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