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법해도 부당한 행정청 처분이라면 행정심판

프린트

경영정보 ㅣ 정책법률 적법해도 부당한 행정청 처분이라면 행정심판 행정소송과 달리 구제 가능…간편·비용 무료, 기업사건인용률 24%

기사입력2017-09-21 13:12

#1. 전기전자기기를 제조하는 A사는 사업장 연구시설 식당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인증받는 과정에서 에너지 사용량을 잘못 기재한 명세서를 제출해, 과도한 온실가스 배출 ‘인증’ 기업이 됐다. 뒤늦게 실수한 것을 알게 된 A사는 환경부에 정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환경부의 거부처분 사유는 실제 배출량을 잘못 기재했더라도 정정사유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환경부의 거부처분이 위법하다고 판단한 A사는 환경부를 상대로 거부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심판을 청구했다. 이에 국민권익위원회는 “단순 오기로 발생한 문제임에도 환경부가 이를 방치한 것은 위법하기 때문에 거부처분을 취소하라”는 재결을 내렸다.

#2. 수산물을 유통·판매하는 B사는 고등학교 급식 납품입찰에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최종 낙찰자로 선정됐다. 그러나 입찰과정에서 투찰금액을 잘못 표기한 탓에 원래 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납품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저가 수산물로 대체해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학생들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는 정당한 이유없이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B사를 부정당업자로 지정, 입찰참가 자격을 2개월간 제한하는 처분을 내렸다.

이같은 처분이 부당하다고 판단한 B사는 행정심판을 청구했고, “투찰금액이 핵심요소인 입찰에서 착오로 투찰금액을 오기한 것으로 보이고, 일주일만에 납품업체가 새로 선정돼 입찰에 큰 차질이나 손실이 발생했다고 할 수 없으므로, 입찰참가 자격을 제한한 처분은 부당하다”는 재결을 받았다.

이처럼 회사를 운영하며 위법 또는 부당한 행정처분으로 권익 침해를 받는 경우, 행정심판제도를 통해 구제받을 수 있다.

<그래픽=이가영 기자> ©중기이코노미

중앙행정심판위원회 강정희 사무관은 지난 20일 국민권익위원회와 대한상공회의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행정심판제도 기업설명회’에서 “기업을 운영하다보면 예상하지 못한 위법 또는 부당한 처분을 받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소송하지 않고 법적으로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가 행정심판”이라며 “행정청의 위법 또는 부당한 처분으로부터 권익을 침해받는 경우 적극 활용해 달라”고 당부했다.

행정심판은 행정청의 위법 또는 부당한 처분으로 인해 권리나 이익을 침해받은 자(者)가 이를 바로잡아달라며 행정기관에 구제를 제기하는 제도다. 행정청에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 법령 또는 자치법규에 따라 행정권한을 가지고 있거나 위탁을 받은 공공단체나 그 기관 등이다.

일반적으로 행정기관의 판단이라고 하면 적법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람이 판단을 내리는 일인만큼, 실수나 예상지 못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정부는 ‘행정심판’과 같은 권익구제 장치를 통해 국민권리를 보호하고 있다.

행정심판은 국민의 권익구제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이의신청·직권취소·고충민원 등의 제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의신청·(행정청의)직권취소·고충민원과 행정심판이 다른 점은 전자의 경우 판단기관은 해당 행정기관이고 간이한 절차가 적용되는 반면 후자의 심판기관은 준사법적 독립 행정기관인 행정심판위원회다. 이외 행정심판위원회의 재결은 심판절차와 심리 모두 사법절차가 대부분 준용된다는 점에서 전자에 비해 공정한 심판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다.

또 행정심판은 법원에 의한 권리구제 방법인 행정소송과 달리 무료인데다가, 훨씬 더 절차가 간편하고, 신속하게 처리된다는 게 장점이다. 예컨대, 인지대나 송달료 등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담이 없다. 또 3심까지 진행되는 행정소송과 달리 단심제로 진행되고, 행정심판위원회의 재결은 원칙적으로 불복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분쟁에 따른 시간과 비용도 줄일 수 있다. 통상 행정심판 청구에서 재결까지 걸리는 기간도 70일로 신속하다. 행정심판의 재결은 확정판결과 동일한 효력을 갖기 때문에 강력한 법적 구속력도 있다.

특히 기업의 경우 사업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행정청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부당한 처분을 받았다해도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 자체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소송준비과정에서 계속해서 얼굴을 마주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건 아닌 것 같다’고 판단해도 행여나 받게 될 불이익을 우려해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적지않다. 그러나 행정심판은 서면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소송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다.

아울러 위법한 처분만을 다투는 행정소송과 달리 행정심판은 위법한 처분 이외 부당한 처분에 대한 구제도 가능하다. 따라서 적법한 처분이라 하더라도 당사자가 받게되는 피해 정도, 당사자의 책임 등과 비교해 가혹한 처분을 받았다면 구제받을 수 있다.

<그래픽=이가영 기자> ©중기이코노미

과거 개인위주로 행해지던 행정심판은 최근 기업의 권익구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 행정심판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해결한 2만6080건의 사건 가운데 기업체 관련 사건은 711건(약 2.7%)으로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그러나 기업사건의 경우 ‘청구가 합당하므로 인정한다’는 인용비율은 전체 사건의 인용률(16.8%)보다 높은 23.8%에 이른다.

행정청이 한 모든 행위가 행정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고 행정청의 ‘처분’ 또는 ‘부작위’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처분’이란 행정청이 행하는 구체적 사실에 관한 법집행으로서의 공권력의 행사 또는 그 거부, 그 밖에 이에 준하는 행정작용을 말한다. 영업정지처분이나 반려처분, 과징금부과처분, 지원금 지급거부처분 등이 해당한다.

‘부작위’란 행정청이 당사자의 신청에 대해 상당한 기간 내에 일정한 처분을 해야 할 법률상 의무가 있는데도 처분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앞서 소개한 A사 사례에서 온실가스 배출량 정정청구를 환경부가 거부도 하지 않고, 정정해주지 않으면서 시간만 보내는 ‘부작위’ 상태인 경우 A사는 의무이행심판을 통해 권리를 구제받을 수 있다. 의무이행심판이란 A사의 정정청구에 대해 환경부가 정정처분이란 ‘작위’를 하지 않은 것이 위법 또는 부당하기 때문에 정정처분을 해 줄 것을 행정심판위원회에 청구하는 심판이다.

단, ‘처분’이나 ‘부작위’에 해당하더라도 ▲대통령이 한 처분이나 부작위 ▲재결(재결 자체에 고유한 위법이 있는 경우는 가능) 등은 행정심판의 대상이 아니다.

행정심판 청구는 처분이 있음을 알게 된 날부터 90일 이내, 처분이 있었던 날부터 180일 이내에 청구인이 피청구인(행정청)이나 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청구서를 제출하면 된다. 무효 등 확인심판, 부작위에 대한 의무이행심판은 기간과 관계없이 청구 가능하다. 온라인을 통해서도 할 수 있다.

이후 행정심판위원회에 청구된 경우 피청구인에게 답변서를 보내고, 피청구인은 10일 이내 이를 작성해 행정심판위원회로 제출한다. 행정심판위원회는 답변서를 조사·확인·검토해 심판을 내린다.

청구인은 심판이 청구되고 난 후부터 각종 제출, 신청, 신고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예컨대, 행정심판이 제기돼도 처분의 효력이나 집행을 정지시키는 효력이 없기 때문에 ‘집행정지제도’를 신청하면 행정청의 처분을 즉시 정지시킬 수 있어 유용하다. 재결 결과에 불복할 경우 재결서를 받은 날로부터 9일 이내에 피청구인을 관할하는 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행정심판위원회 관계자는 “행정심판은 단심제로 승소하는 경우 피청구인은 불복하지 못하고 분쟁이 종료되기 때문에 청구인에게 유리한 측면이 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