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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인상파를 빠삐용의 죄수들처럼 버렸다

루저(loser) 상징으로 보이는 파리 오르세 뮤지엄…빠삐용과 인상파 

기사입력2019-05-15 19:13

70년대 영화 빠삐용에서 프랑스 정부가 식민지 가이아나 섬에 흉악범들을 보내 평생 갇혀서 죽게 한다. 프랑스에서 도착한 새로운 죄수들에게 교도소장은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는 너희들을 버렸다.”

 

프랑스의 19세기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는 미국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쓴 적이 있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다녀와서 SNS에 글과 사진을 올려놓은 걸 자주 본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상파 작가들의 대표작들은 미국 미술관들이 소장 전시하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은 옛날 기차역을 개조해서 만들었는데 인테리어가 특이하다. 내 생각은 프랑스 정부가 쪽팔려서 만들었다. 왜냐하면 프랑스 작가들이 이루어낸 혁명적 미술사조를 프랑스 정부, 미술계 그리고 대중들이 버렸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된 유화는 거의 400년 동안 변화하지 않았다. 현대과학의 발전과 산업혁명은 전혀 상상하지 못할 만큼의 새로운 색들을 작가들에게 제공하게 됐다. 간단한 예로 르네상스 이후 중요한 색이 발견된 것은 겨우 3가지다.

 

Phenomenon-color-app-tin-tube-631<사진제공=김윤아 작가>
1800년도까지 작가들이 사용한 건 30가지에서 15가지 색 정도. 왜냐하면 비싸고, 독성이 있고, 잘 퇴색되고, 화학적으로 불규칙적이었기 때문이다. 1750년부터 1850년 사이 새로운 화학의 발전으로 40가지의 새로운 색이 발견됐으며 1800~1850년 사이에 강한 노랑, 초록, 블루, 빨강, 오렌지색들이 새롭게 발견됐다.

 

이 시점에서 미술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발명은 금속튜브다. 유화물감은 공기에 놔두면 오래 갈 수 없었다. 가루를 이용해서 색을 만든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서 한 번에 쓸 수 있는 색은 최대 2~3가지 정도. 그래서 화실 밖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고 항상 한 번에 한 부분만 완성할 수 있었다. 18세기부터 머리를 짜내 만든 방법은 돼지방광에 물감을 만들어 보존하는 것. 그러나 돼지방광에서 물감을 내려면 송곳으로 찔러야 하는데 항상 지저분하고 화학반응으로 자주 폭발하기도 했다.

 

1841년 미국 작가 존 랜드가 금속튜브를 발명해 야외, 카페 등에서도 쉽게 작업할 수 있고 물감도 오래 보존할 수 있게 됐다. 작가는 더 이상 화실에서만 작업할 필요가 없고 야외에서 작품을 끝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네, 시슬리, 르노와르, 피사로 등 인상파 작가들은 데생과 명암(chiaroscuro) 위주의 전통적 양식에서 벗어나 새롭게 발견된 색들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히 금속튜브 덕분에 야외의 자연광선을 새로운 색들로 표현할 수 있었다. 미국 발명품이 아니었다면 인상파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르누아르는 말했다. 미국 덕을 본 것이다.

 

그 시대의 미술계는 살롱중심으로 정부가 장악해 주도해 나갔다. 그런데 인상파의 작품들은 완성도가 떨어져 보였고 자연광선을 묘사해 밝았으며 일상생활을 주제로 한다는 이유로 학계, 평론가들 심지어 대중들마저 조롱했다. 이때 인상파의 슈퍼맨으로 나타난 사람이 갤러리를 운영한 뒤롱룰이다. 사실 인상파가 실질적으로 시작된 곳은 런던이다. 뒤롱룰과 모네는 프러시아 프랑스 전쟁을 피해 런던으로 피난 와서 바로 거기서 만났다.

 

아트 딜러 뒤롱룰(paul durand ruel)<출처=christies.com>
처음에는 뒤롱룰과 작가의 관계가 매끄럽지만은 않았다. 뒤롱룰은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였고 인상파 작가들은 진보였다. 피사로 같은 작가는 극좌 무정부주의자다(그 시절에는 빨갱이란 주의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러나 뒤롱룰은 인상파의 예술성을 인지한 것뿐만 아니라 인상파 작가들이 미술계와 대중들에게 천대받고 있을 때 작가와 딜러의 관계에 있어서 SM, YG와 같은 소속사의 콘셉트를 미술계에 도입한 장본인이었다.

 

뒤롱룰은 인상파 작가들이 쪼들려 생활할 때 작품을 대량으로 샀다. 그도 크게 여유가 없어서 작품 값을 월급으로 지급했다. 그리고 작가들의 집세, 병원비, 재료비, 옷값을 지불했다. 그는 미술계의 외면으로 작품을 팔았을 때 큰 이익을 남기지 못했다. 1874년에 처음으로 인상파 전시회를 기획했지만, 인상파라는 말이 처음 쓰인 건 1877년 전시회부터였다. 인상파 작품의 매출이 힘드니 그 시절 잘 나가는 작가들과 섞어서 전시회를 기획하기도 했다.

 

뒤롱룰은 또 작가들의 작품을 담보로 돈을 빌린 다음 그 돈으로 같은 작가의 작품을 경매에서 비싸게 샀다. 자기 소속 작가들의 작품값을 뻥튀기 하기 위해서다. 그 시절 갤러리는 화요일이 휴일인데 그는 화요일 콜렉터들을 집으로 초대해 작품을 선보이고 팔았다.

 

그러한 노력과 사기성 사업수단에도 불구하고 인상파의 상업적 가치는 별로였다. 그러던 중 1885년 드디어 대박이 터졌다. 프랑스와 유럽에서 천대받던 인상파가 미국미술협회 회장 제임스 서튼으로부터 초대받아 300점의 인상파 작품을 가지고 미국으로 떠난다. 모네도 자기 작품이 양키 나라로 간다고 걱정했다. 미국의 신갑부들은 인상파 작품을 프랑스 사람들과 달리 조롱하지 않고 사재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현재 인상파의 대표작들은 미국 뮤지엄에서 소장 전시되고 있다.

 

모네는 나중에 뒤롱룰이 없었다면 인상파 작가들이 다 굶어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뒤롱룰은 미국갑부들이 없었다면 부도가 나서 파산했을 것이고, 인상파는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프랑스는 인상파를 빠삐용의 죄수들처럼 버렸다. 미국은 버린 것을 주어서 잘 굴려먹고 있다. 매년 크리스티나 소더비 같은 경매회사에서 팔리는 인상파 작품 값을 보면 쉽게 알수 있다.

 

파리 오르세 뮤지엄이 프랑스의 루저(loser) 정신의 상징으로 보인다.(중기이코노미 객원=김윤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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