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까지 추상미술의 정서적 내면세계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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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까지 추상미술의 정서적 내면세계 강조 [그림을 읽다:GREAT ARTIST] ⑧바실리 칸딘스키

기사입력2015-09-25 12:05

류장복 화가 (jangboki@lycos.co.kr) ㅣ다른기사보기

초창기 칸딘스키가 그린 무르나우의 풍경화를 보고,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모네의 그 그림을 보았다. 도록에 <노적가리>라고 쓰여 있었지만 금방 알아 볼 수 없었다. 당혹스러웠다. 화가가 그렇게 불명확하게 그려도 되는 건가?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러웠지만 대상의 세부까지 어른거리게 할 정도로 인상은 강력했다. 팔레트의 힘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놀랍게도 이제까지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던 재현적인 요소가 그림에 전혀 없었다.”-바실리 칸딘스키

칸딘스키가 모네의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경험을 훗날 회상하며 한 말이다.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는 모네와 마찬가지로 망막에 비친 외부의 인상에 치중해서 자연의 사실적인 외관에 구속되지 않으려고 했다. 그가 그린 풍경화에서 사물은 단순하게 최소화되어 인상적인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땅거미가 질 무렵 작업실로 돌아왔다. 조금 전 사생했던 바닷가의 생생한 이미지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그림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다. 발광하는 아름다움에 전율이 일 정도였다. 다가가서 자세히 보았다. 형태와 색깔이 분간되긴 하는데 도무지 뭘 그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만에 겨우 알았다. 그것은 옆으로 돌려진 내 그림이었다. 다음 날 밝은 햇빛 아래에서 다시 보았다. 그런데 어제 보았던 그 이미지가 아니었다. 곰곰이 따져보니까 어제처럼 석양의 어스름이 없었다. 어제와는 달리 무엇을 그린 그림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대상의 구체적인 구상성이 어제 보았던 그 이미지가 드러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칸딘스키는 즉흥적인 감각에 의존하여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보이는 대상의 외관을 뿌리치려니까 막막하기만 했다. 중력을 벗어난 허공에서 자신을 이끌어 줄 등대가 필요했다. 그는 모스크바 왕립극장에서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관람하다가 경험했던 놀라운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서는 음악과 함께 온갖 색채의 선들이 날뛰며 광기의 드로잉이 펼쳐지고 있었다.

칸딘스키의 CompositionVII을 보고,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칸딘스키의 추상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내용을 담기 위해 추상의 형식을 취한 것이지 추상의 형식 그 자체를 추구하지 않았다. 단지 자연의 현상을 모방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된 선과 색이, 그가 쓴 책의 제목처럼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을 드러낸다. 그의 그림은 자연의 재현이 아니라 내면의 표현인 셈이다. 그가 구사하는 색채와 형태는 그의 마음을 닮은 감각적 외관을 구성한다.

바실리 칸딘스키는 정신의 순수성을 숭배했다. 그는 차 재배사업을 하는 아버지와 미모와 지성을 갖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결혼은 얼마가지 못했지만 그는 별 탈 없이 잘 자라났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고 젊은 법학자로서 그는 일찌감치 주류사회에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뉴턴 과학이 무너지고 방사능이 발견되었던 1896년, 30세의 칸딘스키는 돌연 타르투 대학의 교수직을 마다하고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불안정한 세기말의 부조리한 세상에서 학문보다 예술이 앞으로의 세계에 대해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해줄 것이라고 믿었다는 그의 말은 화가가 되고 싶었던 그가 생각해 낸 명분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학 동기인 사촌 아냐 치미아킨과 결혼한 지 4년 만에 독일의 뮌헨으로 이주했다.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한 칸딘스키는 처음엔 눈에 띌만한 소질을 보이지 못했다. 아카데믹한 기초과정을 마치고 독립적으로 활동하면서부터 그의 지적인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는 진보적인 사고로 사람들을 모으고 전시를 기획하며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모든 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칸딘스키는 상징적인 추상성이 강한 청기사파를 이끌면서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그림들은 이때 주로 쏟아져 나왔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적국이 된 독일을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가야 했다. 칸딘스키의 상징추상과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타틀린의 구축주의는 스탈린이 등장하면서 일시에 파국을 맞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모두 대체됨으로써 러시아의 모더니즘은 종말을 고했다. 그 결과 아카데믹한 자연주의로 되돌아가는 퇴행적인 복고가 돌아왔다. 전쟁이 끝나고 평온을 되찾자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의 초빙을 받아 1922년 다시 독일로 이주했다.

Wassily Kandinsky,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쏟아지는 조악한 산업 생산물에 디자인을 더해 향기를 불어넣고, 불필요한 전통적인 장식을 건축에서 제거해버림으로써 기능성과 예술성을 통일하려 했던 바우하우스의 실용정신은 매우 진보적이었다. 칸딘스키의 추상은 바우하우스를 계기로 교육적인 이론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바우하우스는 1933년 때마침 권력을 잡은 나치당에 의해 폐교되었다. 나치 세력은 추상적인 현대미술을 퇴폐예술로 낙인찍어 모든 그림을 압수했다. 히틀러 치하에서 독일미술은 러시아미술처럼 복고적인 아카데미즘으로 퇴행했다. 칸딘스키는 파리로 이주해야 했다.

칸딘스키의 추상은 크게 인상, 즉흥, 구성의 3단계를 거쳐 나아갔다. 구성 단계의 추상은 기하학적 형상의 추상에서 원형질적인 생명 형상의 추상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그럴수록 회화공간은 투명한 깊이를 더해갔다. 1944년 파리에서 마지막 전시를 마친 그는 그 해 12월 뇌이쉬르센에서 동맥경화증으로 78년의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