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내린 운문사 경내 전경<사진=상상출판>

잔잔한 호수면은 마음을 다잡아 주는 마력을 지녔다. 바람이 잔물결이라도 일으키면 감상은 깊어지게 마련이다. 물길이 끝나는 곳에 운치있는 산사라도 있으면 금상첨화겠다. 마음이 평온해질 테니까. 그런 점에서 운문호와 운문사는 잘 어울린다. 경부고속도로 경산IC로 나와 청도로 향한다. 금천면과 운문면의 경계에 이르니 운문호가 모습을 드러낸다. 운문호수를 따라 10여분 달리다가 시조시인 이호우의 생가가 있는 유천마을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가을 산빛이

고이도 잠긴 산샘

나뭇잎 잔을 지어

한 모금 마시고는

무언가 범한 듯하여

다시 하지 못하다

(이호우의 ‘산샘’ 전문)

짧지만 운문사 가는 길목에서 만난 이호우의 생가와 시비는 강렬한 섬광처럼 마음에 흉터를 남긴다.

운문사 돌담길<사진=상상출판>

제법 차가운 겨울바람에 등을 떠밀려 산문을 지나 먼저 만나는 것은 울창한 솔숲이다. 운문사의 솔숲은 우리나라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숲이다. 수백 년은 됨직한 노송들이 저 마다의 모습으로 서로를 위무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껍질이 붉은 철갑으로 변한 적송들로, 우리 땅의 터줏대감 격인 나무들. 철갑을 두른 듯 두툼한 속내로 하늘을 향해 시원스레 뻗은 모습이 운문사의 청정한 기운을 상생시키는 에너지처럼 느껴진다.

운문사로 향하는 1km 정도의 길은 이 늠름한 소나무들의 수행으로 고단함을 모른다. 솔숲의 끝에서 천년 고찰을 에두르고 있는 돌담이 시작된다. 돌담 초입부터 매서운 겨울바람이 등을 떠민다. 기와를 얹은 나지막한 돌담이 정겹다. 그 돌담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운문사의 규모를 어림잡을 수 있다. 운문사는 범종루를 지나 대웅보전까지 계단이 없다. 마치 평정심을 유지하고, 위와 아래 없이 평등한 눈높이로 살라는 듯하다.

운문사 새벽 문턱<사진=상상출판>

557년 신라 진흥왕 때 세워진 운문사. 이 운문사가 원광법사가 세속오계를 지은 화랑정신의 발상지이며,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탄생지라는 사실은 지나치기 쉬운 부분이다. 1200년 전 원광법사는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세속오계를 전수했다. 고려 충렬왕 때(재위기간 1274~1308년) 이곳 주지였던 일연 스님은 이곳에서 우리가 자손만대까지 전해야 할 삼국유사 5권 2책을 펴냈다. 세기가 바뀐 지금 일연 스님의 자취를 찾아볼 길은 없지만 마음속으로 미세한 울림이 인다.

1958년 불교 정화운동 후 비구니 도량이 된 다음부터는 청렴한 수행자로 유명한 광호 스님 등이 운문사를 거쳤다. 키 작은 담장 너머 허공을 찌르는 굴뚝의 연기가 마치 설화처럼 피어나는 것만 같다. 그래서 운문사의 경내를 합장하며 유심히 살피는 일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다. 마당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에 시선이 절로 간다. 어림잡아도 500살은 훌쩍 넘어 보이는 운문사의 명물이다.

운문호수<사진=상상출판>

처진 소나무의 정정함을 눈에 넣고 경내를 어슬렁거리면 비로전의 연꽃무늬 문살이나, 나한전의 익살스런 불상을 만나게 된다. 마치 보물을 찾아낸 것처럼 기쁨이 찾아든다. 경내의 많은 건물을 눈도장 찍듯 세심하게 관찰하다 우연히 만난 풍경이 매우 인상적이다. 대웅전 툇마루에 가지런히 정돈된 털신이 놓인 풍경은 흐트러짐 없는 여승들의 강단이 느껴진다. 맑은 솔숲, 대가람의 향기가 전해지는 운문사. 속세에서 선계로 이어지는 들목이다. ‘나는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가?’ 겨울 새벽 산사에서 묻고 또 묻는다. 걸어온 길이 다시 어둠 속에 가만히 묻힌다.[유철상 상상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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