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국민·NH농협·롯데카드에서 빠져나간 개인정보 8000만건이 유통됐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불안감이 사회 전체로 번지고 있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불법광고 및 채권추심업체부터 스미싱 조직에까지, 자신의 개인정보가 악용됐다며 신고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그러나 금융당국에서는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피싱, 스미싱 등에 대한 대응요령 배포조치를 이미 취했다”는 설명과 이미 내놓은 대책을 빨리 시행하겠다는 입장 표명 정도가 당국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이번 문제의 핵심은 주민등록번호라는 핵심적 정보가 너무도 편리하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13자리 숫자만 가지고도 기본적으로 생년월일, 성별, 출생지까지 확인이 가능할 뿐 아니라, 금융·통신·인터넷 등 대부분의 ‘현대적’ 활동까지도 조회하고 제어할 수 있다. 여기에 부수적으로 따라붙는 전화번호·주소·신용카드번호·계좌번호와 일대일, 혹을 일대다(多)로 결합하면 말 그대로 범용이자 만능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1962년 주민등록법 제정과 1968년 김신조 침투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주민등록번호 체계는 우리사회를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사분란한 조직으로 만들었다. 이 제도는 통치와 치안의 수단에서 그치지 않고 교육, 금융, 노동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회관계에서 유일무이한 확인수단으로 기능해 왔다. 주민번호를 요구하는 조직의 ‘관리자’ 입장에서 이보다 더 편리하고 저렴한 인식과 분류의 수단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 ‘편리함과 저렴함’이 주민번호 소유자와 관리자뿐 아니라 악용의 의도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이러니다.

의약품과 같은 이치다. 아무리 가격이 싸고 효능이 좋은 의약품일지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부작용이 발견되거나 내성이 생겨 순기능을 못하게 되면 용도폐기할 수밖에 없다. 번거롭고 불편하더라도, 혹은 돈을 더 내야하거나 효능이 약하더라도, 부작용이 적고 안전한 대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 근거는 ‘불가역성’이다. 얼음 녹인 물을 다시 얼리면 얼음이 되지만, 어떠한 수단으로도 예전 상태로 돌이킬 수 없는 사항들이 많다. 생과 사, 질병의 진전과 같은 것이다. 항암제의 허가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것은 잃을 것이 거의 없는 환자에 대한 배려다. 디지털정보의 확대재생산을 핵연쇄반응보다 빨리 이뤄낼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정보의 유출과 악용, 그로 인한 피해는 속도와 파괴력, 그리고 파급력 측면에서 제어 불가능의 불가역성을 갖는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사회가 심각한 고민을 공유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 1월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주민등록번호에 대한 대안의 검토를 지시한 바 있다. 주민등록번호를 폐지할 것이냐, 획기적 개선을 가할 것이냐에 대한 논의는 본질적 측면에서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현행 주민등록번호 체계가 주는 편리함에 기대거나, 통치의 기초라는 ‘성역’으로 남겨두지 않고 새 판을 짤 의지만 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적절한 대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별도로 근원적인 해결책을 낼 동안, 행정·금융·교육을 제외한 분야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는 주민번호 수집을 엄격하게 막고, 피해를 입었거나 불안에 떨고 있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주민번호를 부여하는 대증요법은 최대한 빨리 시행해야 할 것이다. 이미 다양한 사유로 주민번호를 변경한 사례가 24만건에 이르고, 지난 10년간 개명(改名)한 사람이 120만명이나 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러저런 이유로 국민의 불안을 방치하기에는 현재의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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