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관장, 미술평론가

진실을 외면한 판결

휘트니미술관에 가면 사회적 리얼리즘의 화가로 유명한 벤 샨(Ben Shahn 1898-1969)의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그림이 있다. 이 그림 앞에는 다른 그림과 달리 작품을 해설해주는 도슨트를 쉽게 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벤 샨이 그린 작품 속 사건에 관해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예술성보다 사코와 반제티라는 두 사람이 겪은 수난사를 들춰보면 우리사회에 회자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떠오른다.

벤샨-사코와 반제티의 수난-원작

사건 발단은 1920년 4월15일 보스턴 근교에서 구두공장 봉급 호송원 살해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였다. 당시 구두 직공이었던 니콜라 사코와 생선 장수였던 반제티가 이 사건의 용의자로 긴급체포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1급 살인죄를 선고받았다.

이탈리아계 미국인이었던 두 사람은 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었지만, 가난한 이민자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것이 배심원들에게 불신을 심어주었고, 급기야 사형선고의 실질적 이유로 작용했다. 두 사람이 살인사건 현장에 없었다는 증언과 후일 어느 범죄자가 자신이 구두공장 살해사건의 진범이라고 자백을 했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는 6년 동안 프랑스, 영국 등 국내외 수많은 군중이 재판의 부당성에 항거했다. 그러나 끝내 두 사람은 풀려나지 못한 채 1927년에 전기의자에 앉혀지고 말았다. 당시 두 사람의 사형집행에 명령을 내린 사람은 매사추세츠 지사 앨번 풀러였다. 중앙의 세 사람은 국내외의 여론이 악화되었을 때 앨번 풀러로부터 사코와 반제티의 사면 허용 여부의 판결을 자문한 진상조사위원들이다. 하버드대 총장 로웰(위원장),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총장 새뮤얼 스트래튼, 전직 판사 로버트 그랜트 세 사람이다.

그들은 사코와 반제티의 무죄보다 사법부의 권위와 자신들의 지위와 체면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사코와 반제티가 인간으로서 받아야 할 존엄성에는 관심이 없었다. 결국,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 사건은 세계인의 분노를 샀고, 미국 사법부의 가장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됐다.

비극적인 사건이 잊히지 않도록 그림으로 남긴 벤 샨

사코와 반제티의 무죄를 주장하며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시위

오히려 뻔뻔함과 차가운 얼굴로 자신들의 판결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냉소적인 표정으로 응시하며 서 있다. 이러한 표현은 양심을 저버린 세 명을 영원히 조롱하고 혐오하겠다는 벤 샨의 의도적 표현이다. 벤 샨의 의도대로 이 그림은 정치적 희생양이 된 사코와 반제티를 영원히 기억하며 1920년대 미국의 부끄러운 역사를 잊지 않도록 하고 있다.

20세기 세계를 뒤흔든 사건답게 사코와 반제티의 실화는 영화, 시, 노래, 연극의 소재가 되고, 책으로 출판되어 세계인의 기억 속에 남게 됐다. ‘사코와 반제티 사건’ 재판의 부당성이 공식으로 인정되면서 미국 사법부가 두 사람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것은 그들이 사형된 지 50년이 지난 후였다.

타인의 고통보다는 자신의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거짓을 진실인양 속이는 데 익숙하다. 오직 자신의 권위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진실 정도는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인간으로서 받아야 할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에는 무관심하다. 이 점에서 벤 샨의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는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진리와 함께 인간 존엄의 중요성을 되돌아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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