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관장, 미술평론가

가족초상화 중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그림을 꼽자면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1746~ 1828)가 1800년에 그린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고야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보고 감동해 경의를 표하며, 그의 사실주의적 화풍을 적용한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은 특정 화풍에 휩쓸리기보다는 확고한 주관으로 자신만의 독자적 화풍을 이뤄낸 고야의 작가적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고야의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에 대응할만한 가족초상화를 한국미술사에서 찾는다면 서양화가 배운성(裵雲成, 1900~1978)의 <가족도>를 들 수 있다. 한국미술사에서 왕과 사대부를 중심으로 제작한 개인초상화를 제외하고, 왕족이나 특정 가족 전체를 동시에 그린 가족초상화는 만나기 힘들다는 점에서 배운성의 <가족도>는 매우 이례적인 그림이다. 이에 고야의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과 배운성의 <가족도>는 스페인 왕가의 면모와 한국 근대가족의 모습을 비교해볼 만하다.

13명의 왕족도 vs 16명의 일반인 가족도

고야,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 1800, Oil on canvas, 280×336cm. Museo del Prado, Madrid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은 1800년 봄, 스페인 마드리드 남부의 아란후에스에 있는 여름 별궁에서 왕의 부름을 받고 그린 그림이다. 이때 고야는 청력을 영원히 잃게 되어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 <가족도>는 우리나라 최초로 독일 베를린과 프랑스 파리 화단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서양화가 배운성의 작품이다. 1935년 함부르크민속박물관에서 개최된 개인전에 출품한 후 작가의 월북으로 잊혀졌다가 한 소장가가 프랑스에서 그의 작품을 일괄 구입하여 국내에 소개하면서 알려진 그림이다.

우선, 두 그림의 공통점과 차이점부터 살펴보자. 등장인물을 보면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은 고야 자신을 포함해 총 14명, <가족도>는 배운성 자신을 포함하여 총 17명이 그려졌다. 두 화가는 모두 그림 왼쪽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는데 은근한 미소로 가족 전체를 바라보듯 서 있는 배운성과 어둠 속에서 정면을 응시하며 서있는 고야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작품 크기는 두 작품 모두 대작에 속한다.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이 280×336cm이고, <가족도>는 140×200cm이다. 특히 <가족도>는 시대상으로 볼 때 한국근대미술사에서는 보기 드문 크기이다.

고야가 사실주의적 표현과 강한 명암법으로 화면의 깊이감을 나타냈다면, 배운성은 원근법을 최대한 적용하려는 흔적이 엿보인다. 마루 뒤 창문 너머의 장독대와 담장 뒤로 한옥 지붕이 보이는 부분에서 원근법을 살려 묘사한 것이 눈에 띈다. 명암법보다는 덜 효과적이지만, 인물의 대소를 통해 화면의 깊이를 표현하려고 했다.

풍자의 대상 vs 감사의 대상

배운성, 가족도 1930-35, Oil on canvas, 140×200cm, 개인소장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은 이전까지 일반적 궁정초상화와는 다른 것이 특징이다. 주군을 섬기는 궁정화가라면 당연히 왕을 위엄과 기품, 권위와 품격을 지닌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고야는 절대 권력의 상징인 왕과 왕비는 물론 왕족들을 한낱 졸부처럼 표현하며 풍자했다. 이는 그림에 묘사된 왕족들의 면면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우선 가장 위엄 있는 모습이어야 할 왕은 붉은 얼굴색에 뚱뚱한 체격으로 전혀 왕답지 않은 외모를 하고 있다. 더구나 가슴에 주렁주렁 단 훈장은 위엄보다는 경박함마저 느껴진다.

고야는 왕족을 왜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일까?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당시 카를로스 4세는 정치에는 무관심하고 사냥밖에 몰랐다. 선대왕이었던 카를로스 3세가 이뤄놓은 번영이 급격히 무너진 것은 카를로스 4세의 무능함 때문이다. 여기에 권력층의 다양한 악습이 만연하고 정치적 혼란이 난무한 상황을 지켜본 고야에게 왕족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충성심보다는 반감이 더 컸다. 이러한 마음을 감춤 없이 초상화에 그대로 표출한 것이다. 무모할 만큼 솔직한 표현으로 번영의 시대를 무너뜨린 왕권의 무능력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은 고야의 당당함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배운성의 <가족도>는 1930년대 초 화가가 유럽에 있을 때 주인 백인기의 가족을 회상하며 그린 그림이다. 배운성은 당시 서울의 부호였던 백인기의 아들 명곤이 일본 유학생활을 할 때 뒷바라지했던 인연으로 주인의 신임을 얻어 독일 유학생활까지 함께 갔다. 독일에서 생활하는 동안 자신을 신임해준 주인에 대한 감사함과 그리움을 담아 그린 그림이 <가족도>이다. 한옥 마당에 아기를 안고 앉아있는 할머니를 중심으로 가족이 배열해 있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정면을 바라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마치 근대기 가족사진을 보는 듯하다.

이처럼 <가족도>는 근현대 전환기에 대가족이라는 전통가족의 개념을 특유의 한국적 정서가 배어있는 분위기로 그린 따뜻한 그림이다. 무엇보다 남녀노소가 함께 어울리고, 동물까지 가족으로 등장시켜 확장된 근대의 가족개념을 보여준 작품으로 한국근현대 미술을 대표할만한 가치가 있다. 현재 <가족도>는 2013년에 등록문화재 제534호로 지정되어 근대문화재로서 가치를 증명 받았다.

살펴보았듯이 고야의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은 왕족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은 화가의 감정이 숨김없이 표출된 초상화라면, 배운성의 <가족도>는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주인을 감상의 대상으로 삼아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그림이다. 결국에 초상화는 화가의 지위와 재능을 떠나 화가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모델을 대하느냐에 따라 그림 속 인물의 인상이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저작권자 ⓒ 중기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