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차 회사인 A사는 자동차 범퍼 제조사인 B사에 6월9일까지 범퍼 1000개를 만들어달라는 발주서를 보냈다. 제품단가와 하도급 대금 지급시기, 인도장소도 명시했다. A사의 발주서는 하도급법에서 정하는 서면계약서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틀렸다. 발주서는 서면계약으로 인정받지 못해 하도급법 위반에 해당한다.

전경련중소기업협력센터가 7일 주최한 하도급 교육에 참석한 법무법인 화우 구상모 변호사에 따르면 발주서는 하도급법상 서면계약으로의 효력이 없다. 현장에선 발주서로 서면계약을 갈음하는 경우도 많으나 공정거래위원회와 법원의 생각은 다르다. 발주서는 원사업자의 업무지시일뿐 수급사업자가 합의했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날 교육에는 170여명의 대·중소기업 실무진이 참석한 가운데 발주서를 하도급계약서로 대신할 수 없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원사업자 쪽 실무진들에서는 “하루에도 몇건의 제조위탁을 하는데 일일이 계약서를 쓰는 것이 번거롭다”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대법원에서는 이미 발주서를 적법한 서면교부로 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판례에 따르면 금형 제조사인 D사는 발주자인 C사로부터 자동차 금형 제조위탁을 받았다. D사는 금형 일부를 E사에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D사는 E사와 서면계약없이 발주서만 보냈다. E사가 하도급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자 D사는 발주자인 C사가 금형 제작비용을 사후에 결정해 E사에 지급할 하도급금을 확정할 수 없었다고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도급법 3조에 따르면 원사업자는 하도급 계약내용을 서면으로 발급해야 할 의무가 있다. 거래상 불리한 위치에 있는 수급사업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계약서 양식이 있는 것은 아니나 반드시 포함해야 하는 내용은 있다. ▲제조·용역 위탁 목적물 ▲목적물 인도시기 및 장소 ▲목적물 검사방법과 시기 ▲하도급대금 지급방법과 기일 ▲원사업자가 원재료를 제공하는 경우 원자재 제공 및 대가 지급 내용 ▲원재료 가격변동에 따른 하도급대금 조정 요건이다. 이 중 한 가지라도 빠지면 불완전 서면발급이다.

하도급계약서는 사전발급이 원칙이다. 수급사업자가 작업에 착수하기 전까지 계약서 발급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의미다. 제조위탁이라면 물품납품을 위한 작업을 시작하기 전, 건설위탁은 공사를 시작하기 전, 수리위탁은 수리를 시작하기 전, 용역위탁은 용역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계약서를 써야 한다.

8년간 공정위 심결전문관으로 일했던 구상모 변호사에 따르면 공정위는 서면미교부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는 추세다. 구 변호사는 “과거에는 경고, 시정명령 등 상대적으로 낮은 제재를 했으나 최근에는 거래가 완료된 후에도 계약서를 교부하지 않는 반복적 행위에는 과징금을 부과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S종합건축사무소는 하도급 계약서 55건을 사후 교부했다가 2012년 과징금 1700만원 처분을 받았다. 서면미교부·지연교부에 과징금을 부과한 최초의 사례였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외주산업 구조 안에서 중소기업은 수급자인 동시에 원사업자가 될 수도 있다. 중소기업이라고 무조건 수급사업자는 아니라는 의미다. 하도급법에 따르면 원사업자는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에 소속된 대기업과 중견기업, 수급사업자보다 고용인원이나 매출액이 많은 중소기업이다. 예외사항도 있다. 건설위탁에서는 시공능력평가액이 30억원 미만, 제조위탁에서는 연매출액 20억원 미만, 용역위탁에서는 연매출액 10억원 미만인 중소기업은 원사업자에서 제외된다.

원사업자가 위탁한 제조·용역은 수급사업자의 업과 일치해야 한다는 조건도 붙는다. 건설사가 의류 제조사에 작업복 제작 의뢰를 맡기는 건 하도급 계약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업이 같아도 제조위탁이 아닌 단순구매라면 하도급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 제품의 사양, 규격, 품질을 지정해 위탁해야만 하도급거래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