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관장, 미술평론가

뱀 VS 원숭이

천경자는 한때 ‘뱀을 그리는 여자’라는 호칭으로 유명했다. 25호 크기의 종이에 서른다섯 마리의 뱀이 서로 엉켜있는 그림 <생태>(1951)로 사회적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여자가 뱀을 그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당시 전시회가 열리던 부산 칠성다방에 관람객이 몰려왔던 일화는 유명하다. 1977년 <생태>를 그린 25년이 지난 후 천경자는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라는 그림에서 또다시 뱀을 등장시켰다. 53세에 22세를 회상하며 그린 자화상이다. <생태>에 그린 뱀과 달리 황금빛 색채를 띤 화려한 꽃뱀이 등장한다. 마치 머리에 화관을 두른 듯 네 마리의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이 섬뜩하면서도 강렬한 힘을 느끼게 한다. 뱀의 색과 정면을 응시한 눈동자, 뱀의 색을 띤 입술이 연결되면서 우수에 찬 여인의 모습이 일순간 커다란 뱀의 화신처럼 다가온다.

천경자와 프리다칼로의 화관 쓴 모습 사진과 작품

천경자가 뱀을 그리기 위해 했던 노력(?)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그녀는 뱀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 뱀집 주인에게 부탁해서 뱀 상자를 만들었다. 수십 마리의 독사와 꽃뱀을 투명한 유리상자에 집어넣고 얽히고설키며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그렸다. 그렇게 탄생한 그림이 <생태>였고, 이후 뱀은 그녀의 화신처럼 붙어 다녔다.

천경자는 왜 혐오스러운 뱀을 그렸을까? 그녀가 뱀을 그린 동기는 사랑한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한 후 그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서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녀가 스스로 밝힌 이유는 오직 ‘인생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었다. 두 번의 이혼, 아버지의 죽음, 자신에게는 저항의 상징이었던 뱀이 타인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던 셈이다.

훗날 자신의 수필집에서 ‘에덴동산에서 이브를 홀려 인간으로서의 슬픔과 기쁨, 고뇌를 맛보게 했다는 창조의 요술사, 요기로운 광채와 지성의 뱀님을 한 번 더 그려볼까 한다’(수필 모음집-<탱고가 흐르는 황혼>)라고 고백했던 글은 많은 의미를 준다.

천경자의 뱀에 견줄만한 프리다 칼로의 동물은 원숭이다. 그녀는 원숭이를 유난히 좋아했다. 원숭이와 함께 그려진 초상화가 다른 동물보다 유독 많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프리다의 진한 눈썹이 원숭이의 이미지와 닮아 보일 때가 많다. 프리다에게 원숭이는 애완동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종이에 채색

무엇보다 18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아이를 갖기 힘들게 된 이후 그녀에게 아이는 삶에서 이루고 싶은 커다란 소망이었다. 그러나 거듭된 유산으로 좌절하고,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극에 달했다. 이러한 고통에서 심리적 위안이 되었던 것이 동물들이었다. 1940년 <자화상>에서 가시 넝쿨에 목이 조이며 피를 흘리는 자신의 아픔을 덜어주는 대상이 동물들임을 암시한다.

새와 원숭이가 넝쿨을 끊거나 떼어내려는 장면에서 그녀가 애완동물에게서 삶의 고통을 위로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프리다는 여러 동물 중 원숭이의 재롱을 피우거나 노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여겼을 것이다. 천경자에게 뱀이 저항의 상징이었다면, 프리다에게 원숭이는 사랑(아이)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꽃 VS 꽃

두 화가가 즐겨 그린 소재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가 꽃이다.

천경자는 ‘뱀을 그리는 여자’에서 ‘꽃과 여인을 즐겨 그리는 여자’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를 희망하면서 실로 많은 꽃과 여인을 그렸다. 프리다 칼로는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언제나 화려한 꽃으로 머리를 장식했다. 꽃은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죽음의 불가피성’, ‘쾌락의 무의미함’, ‘인생무상’을 상징하는 바니타스(Vanitas)적 의미로 표현된 대표 소재이다.

프리다칼로 자화상, 1943

프리다는 1970년 중반 세계적으로 일어난 페미니즘 미술 운동과 더불어 재조명되었다. 그녀의 전기가 영화로 제작되고, 미술시장에서 그녀의 작품이 인기를 끌면서 유명해졌다. 특히 마돈나와 같은 유명인들이 그녀의 작품을 수집하면서 더욱 대중적 사랑을 받았다.

천경자 역시 당대 최고 인기 작가답게 한국미술시장에서 작품 값이 가장 비싼 화가에 속한다. 뚜렷한 자기 세계관을 통한 특색 있는 작품세계는 대체불가한 천경자만의 독창적인 세계이다. 그림을 자식처럼 아껴서 자신의 작품이 돈으로 환산되어 팔리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정작 미술시장에서 원작을 만나기 힘들다.

한국을 대표한 최고의 화가였던 그녀가 미인도 위작사건으로 이미지가 퇴색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을 기증(93점)하고, 뉴욕으로 홀연히 떠난 천경자. 이후 실질적인 작품 활동을 접었던 그녀의 삶과 예술은 우리에게는 영영 찾을 수 없는 잃어버린 기억이 되었다. 화가가 떠나고 없는 지금 남겨진 작품만이 그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예술의 세계가 얼마나 깊고 아름다웠는지를 깨닫게 한다.

소설가 박경리가 ‘천경자’라는 시에서 묘사했듯이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였을지 모르지만,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였고, ‘정직한 생애’를 살았던 진정한 화가였다.

천경자와 프리다 칼로는 여자 화가라는 불합리한 핸디캡을 온몸으로 저항하며 아름다운 예술세계를 꽃피운 화가들이었다. 두 사람이 남긴 많은 작품은 그녀들 머리 위를 수놓은 화려한 꽃들처럼 영원히 시들지 않은 예술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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