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사업자인 대기업이 수급사업자인 중소기업에 정당한 사유 없이 기술자료를 요구하는 것은 하도급법 위반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관건은 무엇을 기술자료로 볼 것이냐다. 실제로 현장에서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공정거래위원회의 설명이다. 

공정위 제조하도급개선과 곽고은 사무관은 지난 23일 중기이코노미와의 통화에서 “수급사업자가 기술유용을 당했다며 신고를 해도 막상 조사에 들어가면 기술자료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기각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공정위 심사지침에 따르면 기술자료란 수급사업자의 상당한 노력에 의해 비밀로 유지되는 자료다. 제조, 수리, 시공, 용역 수행방법에 관한 자료이거나 영업활동에 유용하고 독립된 경제적 가치가 있는 기술·경영상의 정보를 기술자료로 본다. 대표적인 것이 특허, 디자인 등 지식재산권 관련 기술 정보와 장비 정보, 매출 정보, 생산원가 내역서다.

특히 생산원가 내역서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공정위 출신인 법무법인 화우 구상모 변호사는 중기이코노미 취재과정에서 “견적서는 수급사업자가 받고자 하는 주관적인 금액인 반면, 원가는 생산하는데 얼마나 든다는 사후적 개념이자 객관적인 수치”라면서 “견적서를 받으며 과거 유사 제품의 원가를 요구하는 원사업자가 있는데 이는 위법”이라고 말했다. 구 변호사에 따르면 간접적으로 유용한 정보나 연구개발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정보도 기술자료에 포함된다.

법인등기부등본, 재무제표, 신용평가자료, 공사 실적은 기술자료로 인정하지 않는다. 원사업자가 거래를 개시하거나 재계약 여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수급사업자의 건전성, 계약 이행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기술자료 요구행위는 원칙적으로 금지다. 다만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요구할 수 있다. 이때는 원사업자와 수급사업자가 기술자료 요구 목적, 비밀유지에 관한 사항, 권리 귀속관계, 대가 등을 합의한 뒤 해당 자료를 서면으로 남겨놓아야 한다.

LG하우시스는 협력업체에 금형 상세 설계도면을 요구했다가 2014년 공정위로부터 시정명령을 받았다. 이 회사는 2011년부터 2013년까지 금형 제작을 수급사업자에게 위탁하는 과정에서 상세 설계도면을 요청했다. 주요 부분을 제조하는 방법과 제작 시 유의사항이 포함돼 있는 기술자료였다.

공정위 조사과정에서 LG하우시스는 “시험생산 과정에서 금형을 수정하거나 하자가 발생했을 경우 유지·보수하려면 도면이 필요했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술자료를 요구할만한 정당한 사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이 회사는 기술자료 요구 목적이나 비밀유지에 관한 합의도 하지 않았다.

더 심각한 것은 중소기업의 기술을 빼앗아 유용하는 행위다. LG화학이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수급사업자의 기술을 빼돌려 해외법인에서 생산한 혐의로 2013년 과징금 1600만원과 함께 검찰 고발을 당했다. LG화학이 기술을 빼돌린 배터리라벨 제조사 Y는 직원 7명, 연 매출 5300만원에 불과한 소기업이었다.

현장에서는 중소기업 기술유용이 횡행하고 있으나 정작 적발 사례는 많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9월 새누리당 유의동 국회의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2년부터 현재까지 공정위에 신고된 중소기업 기술탈취·유용은 14건이었다. 이 가운데 시정명령이나 과징금 처분 등 조치를 내린 것은 LG하우시스와 LG화학 두 건 뿐이었다.

당사자 간 합의로 신고를 취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공정위 설명이다. 공정위 곽고은 사무관은 “신고 접수 후 원사업자가 피해보상을 해주겠다고 제안하면 수급사업자가 신고를 취하해 사건이 종결되는 경우가 많았다”며 “현재도 기술유용과 관련해 조사 중인 사안이 있으나 아직 공개할 단계는 아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