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 태종대(太宗臺),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지본수묵채색, 32.8x53.4cm, 연도미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시대적 변화는 따라가기 버거울 만큼 빠르고 변화무쌍하다. 과학기술과 교통의 발달에 따른 시·공간, 문화의 변화는 근거리 소통만 이루어지던 시대의 지역문화권을 넘어 세계 어느 문화든지 실시간으로 접하게 되어 ‘문화권’이란 단어가 무색 할 만큼 문화 보편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우리는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인 한국이란 땅에서 살고 있지만, 과거와 달리 동양철학이나 한자문화에 대한 교육보다 서양식 교육에 익숙해져 있으며 생활방식 역시 ‘단오(端午)’보다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를 즐기는 문화가 만연해 있다. 이런 가운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조상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읽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볼 때 서양미술은 쉽게 접근하지만, 한국화(전통)는 고리타분하고 동떨어져 있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즉, 한국화가 우리 것이지만 우리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림 속 풍류 즐기는 선비들

정수영, 백사회야유도(白社會野遊圖) 지본 담채, 41×31cm, 1784년 , 개인소장

한국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하지만 관객은 작가의 의도를 알고자 하는 욕구를 갖는다. 그렇다면 관객은 스스로 작가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 좋다. 한국화 역시 마찬가지다. 전통의 그림이라면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통해 그 시대 사람의 마음이 되어 작품을 감상하게 되면 조금 더 풍요로운 감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여유를 즐기는 것은 사치이자 낭비라는 인식이 있다. 한국인들은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가졌을까? 우리는 여유를 즐길 줄 아는 그런 민족이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국가와 가난한 가정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열심히 살아온 시간 속에서 여유를 잃어버렸는지 모르지만, 과거의 조상들은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삶을 살았다.

우리의 조상들은 어떻게 여유를 즐겼을까? 오늘날 남아있는 당대 화가들의 그림을 통해서 그 시대의 생활 속 풍류를 알아보고자 한다.

김홍도,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종이에 담채, 117.2×52㎝, 간송미술관 소장

선비의 마음에 비쳐진 봄

따사로운 봄날 점잖은 선비가 말구종 아이를 앞세우고 길을 나섰다. 오른손은 고삐 쥐고 왼손엔 쥘부채를 반쯤 펴 가볍게 들었으며, 종아리엔 가뿐하게 행전을 쳤고 두 발은 발막신을 신어 슬쩍 등자에 걸쳤다. 봄빛을 담은 버들가지에는 연둣빛 새 이파리가 움돋는다. 고요한 봄날의 정적 속에 환하게 퍼지는 소리가 버드나무 위에서 들려온다. 온몸에 선명한 황금빛을 두른 노란 꾀꼬리 한 쌍이다. 선비는 말 위에서 가만히 숨을 죽인 채, 어여쁜 꾀꼬리가 노래하는 갖은 소리 굴림을 듣는다.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도 (馬上聽鶯圖)>다. 바삐 어디론가 가던 선비는 봄기운 가득한 길을 지나다 하염없이 늘어진 버들가지를 바라보며 마음이 느긋하고 여유로워진다. 이 때 들려오는 꾀꼬리의 노래 소리는 어떤 악기 소리보다 더 아름답고 흥겹기만 하다. 선비 뒤쪽의 여백은 꾀꼬리의 노래 소리에 빠져 주위를 의식하지 못하는 몰입의 상황을 연출하는 듯하다. 어찌 이런 순간에 시 한수 안 읊을 수 있을까? 봄날 선비 마음에 이는 춘심(春心)이 시와 함께 흐른다.

어여쁜 여인이 꽃 아래에서 천 가지 가락으로 생황을 부나(佳人花底簧千舌)

운치 있는 선비가 술상 위에다가 밀감 한 쌍을 올려놓았나(韻士樽前柑一雙)

어지럽다 황금빛 베틀 북이여, 수양버들 물가를 오고가더니(歷亂金梭楊柳崖)

비안개 자욱하게 이끌어다가 봄강에 고운 깁을 짜고 있구나(惹烟和雨織春江)

이경윤,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 견본 수묵, 31.2×24.9 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무현금(無絃琴)의 풍류

무현금의 풍류를 그린 이 작품은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의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다.

둥그런 보름달이 뜬 밤에 금(琴)을 타는 선비와 그 옆에서 차를 다리는 시중드는 아이가 있다.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는 선비의 몸짓은 거침없이 넓고 큰 기개가 서려 주변을 환히 밝히고 있는 듯하다. 달빛과 거문고의 음률과 차향이 하나 되는 순간이다. 멋과 운치가 서려있는 전경 속에서 선비는 거문고를 친구 삼아 한적(閑寂)함을 달래고, 거문고의 조촐한 ‘흥’을 빌어 외로움과 번민을 노래했다.

풍류라는 것이 여럿이서 즐기기도 하지만, 호젓한 장소에서 혼자 즐기기도 한다. 이 때 혼자 즐기는 풍류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거문고였다. 거문고가 시(詩), 주(酒)와 함께 풍류 생활의 필수적인 요소로 사랑을 받았던 것은 그것이 선비들에게 있어 거문고를 즐기는 뜻은 단순한 기예의 연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도를 배우고 터득하는 단순한 악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문고와 더불어 즐기는 풍류는 공자의 악도(樂道)와 두보, 도연명, 소동파의 풍류와 연결되어 무현금을 타면서 스스로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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