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 디자인의 바탕이 된 1조원의 검은 사각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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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디자인의 바탕이 된 1조원의 검은 사각형 모든 색을 섞으면 검은색, 모든 형태의 기본은 사각형…카지미르 말레비치

기사입력2016-08-01 18:51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평론가, 종합인문주의 정치비평지 ‘말과활’ 편집위원

“카톡”, “카톡”. “여러분들은 지금 1조원짜리 그림을 보고 계십니다.”

가을이 무르익던 작년 11월 어느 날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는 단체 메신저 방에 재미있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가치 1조원 명화 밑에 숨겨진 그림 2점 발견’이라는 서울신문의 한 기사도 함께 캡처되어 있었다. 그 밑으로 “우리 아이들이 그리던 그림 같은데^^~”라는 메시지가 이어졌다. 단체 메신저 방에서는 “ㅎㅎㅎ”, “전 검은 삼각형 한 번 그려볼까요?^^”라는 익살스러운 반응이 올라왔다.

과연 1조원짜리 그림은 어떤 작품이길래? 왜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그려보겠다고 나서는 것일까? 메시지 창에 올라온 작품은 바로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대표작 ‘검은 사각형(Black Square)’이었다.

흰 바탕에 검은 사각형이 그려진 것이 전부인 작품. 신문기사에는 이 작품에 대해 “그 가치만 우리 돈으로 1조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라고 적혀 있었다. 검은 사각형이 전부인 작품이라니. 이 작품에 대한 일반인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하다. ‘검은 사각형이 1조원?’

아이폰의 요람이 된 ‘검은 사각형’

카지미르 말레비치 ‘Black Square’, ‘Black Circle’, ‘Black Cross’<자료= http://www.huffingtonpost.com(AP Photo/Francois Mori)>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으로 유명한 아이폰이 내 손에 들려있다. 심플한 이 스마트폰은 사실상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제일 친한 친구이다. 디자인에서는 세련미가 느껴진다. 요즘 디자인의 추세는 ‘심플’. 아이폰처럼 요즘은 많은 전자제품이나 인터넷 아이콘이 심플해지고 있다.(‘심플(simple)’을 ‘단순함’이라고만 해석할 수 없다. 그 안에는 세련미가 포함되어 있다. ‘단순한 아이폰’이라 말한다면 얼마나 우스운가)

그럼 이런 심플한 디자인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아이폰을 만든 애플사는 단순하고 간결한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그들의 디자인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는 정제되고 극단화된 조형미를 추구하는 예술주의의 세례를 받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미니멀리즘은 1915년에 시작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Suprematism)’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절대주의의 대표작은 단체 메신저방에서 ‘우리 아이들이 그리던 그림’ 같다던 바로 그 그림, ‘검은 사각형’이다.

그럼 이제 정리해보자. 내가 들고 있는 아이폰은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제품이고, 이 미니멀리즘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바로 그의 ‘검은 사각형’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검은 사각형’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거칠게 말해서, 어쩌면 세련된 디자인으로 평가되는 아이폰이 내 손에 없을지도 모른다.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79.5x79.5cm, 1915, 모스크바 트레이차코프 미술관 소장)과 아이폰 6 골드.

그렇다면 말레비치는 왜 ‘검은 사각형’을 그린 것일까? 카지미르 말레비치(1878~1935)는 러시아 추상미술의 선구자이며, ‘절대주의’의 창시자로, 기존 회화의 모티브(어떤 ‘사물’을 그리려는 속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직 절대적인 기하학적 구성요소만으로 구축된 혁명적인 추상화를 선보였다. 그는 이 검은 사각형을 “모든 회화를 불태운 (검은) 화장터”라고 말했다. 그림에서 제거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제거했을 때 발견할 수 있는 불변의 절대적 속성, 모든 것을 불태웠을 때 남게 되는 본질, 그 형상의 본질을 새로운 회화의 출발점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추구했던 것은 회화의 절대성이었고, ‘절대주의’를 창안한 것이다. 모든 색을 섞으면 검은색이 된다. 모든 형태의 기본은 사각형(혹은 원, 삼각형)이다. 그는 검은색과 기본 형태를 ‘검은 사각형’이라는 작품으로 드러냄으로써 회화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였다.(‘검은 사각형’을 ‘성화(εἰκών)의 관점’이나 ‘만민 평등을 추구한 혁명 직전 러시아 분위기의 반영’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회화의 본질을 지나 인간의 본질로

회화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검은 사각형’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되짚어 보게 한다. 아름다운 풍경화나 인물화를 보며 그림의 본질보다 그 아름다움에만 심취하듯이, 한 인간의 중심에 자리 잡은 본성보다 고급 외제 차나 명품 가방, 화려한 스펙 등 그 사람의 외적인 화려함에 너무 주목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그렇다고 인간의 외적 조건을 무시하자는 말은 아니다. 절대 그럴 수 없다. 아무리 멋지게 장식된 건물을 짓더라도 그 건물을 세우는 기둥들이 빈약하다면 곧 무너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기둥들만 든든하고 아무 장식이 없다면 을씨년스러운 건물이 된다. 우리가 꿈꾸는 건물은 기둥들이 든든히 서 있고 아름다운 장식이 곁들어진 건물이다. 만약 ‘검은 사각형’과 같은 작품들로만 미술 세계가 구성되었다면 그 느낌이 어떠하겠는가. 미술의 본질은 곱씹어보겠지만 스산한 느낌이 들지 않겠는가.

‘검은 사각형’은 말레비치가 회화에 대한 본질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로 인해 이 작품은 ‘1조원’이라는 큰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이지만 아이폰 같은 제품을 디자인하는데 바탕이 된 ‘검은 사각형’. 잠시 우리의 외적 조건을 잊고, 자신의 본질을 탐구하는 시간을 한 번쯤은 가져봐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