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분쟁시 무효심판 청구, 시간 끌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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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분쟁시 무효심판 청구, 시간 끌어라” 기술제안서 탈취·인력 빼가기 등 다양한 대기업의 기술탈취 사례

기사입력2016-08-10 00:00

김성화 기자 (rukawasss@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 정밀기계관련 중소기업 A사는 독자적 기술로 제품을 개발해 대기업에 납품했다. 대기업은 제품의 납품과 함께 기술제공을 요청했고, A사는 거래단절을 우려해 이에 응했다. 이 대기업은 B사에 기술을 넘겨줬고, A사와 B사가 서로 가격 경쟁을 하도록 했다. A사는 당연히 납품가격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 중소 이동통신업체 A사는 응급상황에서 버튼 하나로 사전에 정해진 수신자에게 자동연결되는 ‘휴대폰 비상 호출 기능’을 특허 출원했다. 이어 기술상용화를 위해 대기업 L사에 제안서와 자료를 제출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런데 1년 뒤 대기업 L사는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가진 긴급상황 통보시스템이 탑재된 핸드폰을 출시했다. A사가 대기업 L사를 상대로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하자, L사는 A사의 특허가 일본의 특허와 유사하다며 특허무효소송을 냈다. 대기업 L사가 제기한 특허무효소송에선 A사가 승소했다. 그러나 A사가 제기한 특허침해소송에선 기술구성과 효과가 다르다는 이유로 대기업 L사가 승소했다. A사가 대기업 L사를 상대로 한 특허침해주장이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 중소기업 A사는 휴대폰 자동개폐장치를 개발해 대기업 S사에 납품했다. 그러나 S사는 얼마 후 예고없이 거래중단을 통보했다. 후에 알고 보니 S사는 A사의 기술을 자사 계열사를 통해 동일한 기술로 자체생산하고 있었다. A사는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하고 승소했지만, S사와의 거래중단 이후 영업선이 막혀 경영난으로 부도를 맞았다.

국회 의원회관에서 9일 열린 '대기업-중소기업 상생방안 무엇인가' 토론회에서는 대기업에 실질적 효력이 없는 특허소송 손해배상에 대한 지적이 나왔다. ©중기이코노미

기술제안서만 받고 거절, 인력만 쏙 빼가는 대기업

더불어민주당 민병두 의원실 주최로 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대기업-중소기업 상생방안 무엇인가’ 토론회에서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정연덕 교수가 밝힌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기술탈취 사례다. 이외에도 대기업이 수탁기업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받은 기술제안서를 탈취하는 경우도 있고, 중소기업과 공동으로 연구개발하면서 핵심기술 탈취 후 공동개발을 중단하고 자체생산에 들어가는 유형도 있다. 기술자문 과정에서 유출되기도 하며, 상하이 자동차가 쌍용차 인수시 맺은 계약내용에 반해 생산기술과 하이브리드 관련 기술을 유출했듯이 M&A과정에서도 발생하기도 했다.

고급인재를 구하기 힘든 중소기업에 인력을 통한 기술유출은 골칫거리다. 대기업은 중소기업들이 어렵게 확보한 우수인재들을 무분별하게 스카우트 하거나, 타사로의 취업을 알선하면서 간접적으로 기술을 탈취하기도 한다.

정 교수는 “외국기업은 기술과 인력을 함께 가져가는 M&A를 방식을 택하지만, 국내기업은 M&A보다는 핵심인력과 기술만을 빼내가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며 “근로조건이나 임금격차 때문에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중 불공정유인·채용행위로 의심되는 건이 상당수 존재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소기업으로선 개인의 자발적 이직에 대해 불공정 소지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

중소기업 특허소송 부담…대기업은 시간끌기

2007년 70건이던 대기업·중소기업간 특허분쟁 소송은 2010년 32건으로 줄었다. 정 교수는 “사례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중소기업들이 소송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허소송에서 증거확보와 입증책임은 소송을 제기한 중소기업에 있다. 중소기업으로서는 지식재산권 전문인력 확보를 비롯해 소송에 따른 재정적·시간적 소요를 감당하기 힘들다. 또 소송을 이어가더라도 승소한다는 보장도 없다. 대기업의 기술탈취와 관련 중소기업의 승소율은 2007년 50.9%에서 2008년 55.5%로 상승했지만 이후 2009년 45.25%, 2010년 47.4%, 2011년 42.2%로 점점 낮아지고 있다. 정 교수는 “언론에서 몇 백건 된다는 기술탈취 사례가 실제로 법원까지 가는 경우는 1~2건”이라고 말했다.

대기업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2011년 모 대기업 부장급 세미나에서 유출돼 언론에 알려진 ‘특허분쟁 대응 매뉴얼’은 ‘특허분쟁시 특허권리 무효심판 청구를 하고 시간을 끌어라’, ‘허점없는 특허는 없다. 허점을 노려라’, ‘시간을 끌면서 의견서를 많이 제출하도록 하는 것도 작전이다’, ‘중소기업 또는 개인발명가들이 많은 기술과 아이디어를 들고 찾아온다. 이때 기술이 좋다는 내색을 하지 마라’ 등의 지침을 담고 있다.

©중기이코노미

소송에서 이겨도 손해배상액은 기껏 5000만원

기술유출 행위를 제재하기 위한 법으론 ‘영업비밀보호법’, ‘중소기업기술보호법’, ‘하도급법’ 등이 있다. 또 기술 개발기업이 기술자료를 대·중소기업협력재단에 보관하고, 파산·폐업 등 교부조건 발생시 기술 사용기업이 돌려받도록 하는 ‘기술자료 임치제도’, 기술유출에 따른 중소기업의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중소기업청과 대·중소기업협력재단에서 시행중인 ‘중소기업 기술유출 분쟁조정제도’가 있다. 하지만 이런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기술유출 사례가 나오는 이유는 기술탈취를 통해 받는 페널티보다 보다 기술탈취를 통해 얻는 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2000년에서 2009년 상반기까지 선고된 국내특허권 침해 및 손해배상 민사사건 1심에서 특허권을 침해받은 기업이 인용판결을 받은 경우는 전체 사건중 26.8%, 권리자의 청구가 전부 인용된 경우는 9.7%에 불과하다. 또 손해배상 인용된 경우 손해배상금은 5000만원 이하인 경우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특허권 침해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도 대기업은 도둑질한 기술로 몇 억원, 몇 십억원의 이익을 올린 후, 시간을 끌고서 5000만원만 배상하면 소송은 끝난다.

더욱이 기술특허의 경우 특허무효소송이 받아들여지면 그 순간 특허의 가치는 0원이다. 중소기업들은 시간을 끌수록 손해만 커져 마지못해 낮은 손해배상액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정 교수는 “최소한 7~8년 걸리는 특허소송 기간 동안 기술트렌드가 바뀐다. 소송에 들어가면 사실상 그 기술은 끝”이라며 “중소기업들이 이기는 경우도 드물지만 특허와 관련해 억대 손해배상액을 받는 경우도 드물다”고 말했다.

결국 법을 지키는 것보다 법을 어기는 것이 더 이익인 현재 시스템이 문제다. 실질적인 보상과 징벌배상을 더욱 늘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중소기업연구원 이동주 본부장은 “국내와 달리 미국에서 국내 대기업들이 기술유출 소송을 당한다면 손해배상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중소기업청 조사에 따르면 대기업과 거래하는 중소기업의 12.1%가 3년내 기술유출피해를 경험하고, 건당 피해액이 15억7000만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이어 정교수는 “하도급법에 3배까지 배상을 규정하고 있지만 원하청관계가 아닌 소송당자자의 경우에는 이 규정을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라며 “손해에 상응하는 금액이 배상될 수 있도록 법 제도 개선 등 실질적인 방안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