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만원의 돈을 들여 ‘불량’ 자동차를 구입했음에도 그 흔한 리콜 또는 A/S를 강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 바꿔말해 소비자가 피해를 입었는데도 보호장치가 미흡하다는 얘기다.

한국소비자원(이하 한소원)의 ‘소비자피해구제 연보 및 사례집’에 따르면, 지난해 자동차 피해를 구제해 달라고 한소원에 접수한 건수가 모두 675건이다. 이중 품질·A/S 관련 피해 건수는 모두 544건, 전체의 80.6%로 압도적이다. 품질·A/S 관련 피해는 동일 하자에 대해 여러 번 수리를 반복해 제품의 교환을 요구하는 사례다. 자동차 소비자 피해 보상은 ‘자동차관리법’이나 ‘소비자기본법’이 아닌 공정거래위원회의 ‘소비자분쟁해결기준(제2015-18호)’ 고시에 따라 진행된다. 고시의 법적성질이 행정기관 내부의 준칙에 불과하기 때문에 강제력이 없어 소비자를 보호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갖는다.

공정위 소비자정책과 김현수 사무관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 임의규정이기 때문에 고시를 위반한 경우에도 공정위가 개입해 과태료나 시정명령을 내릴 근거가 없다”고 중기이코노미에 밝혔다. 또 국회입법조사처 한 관계자는 중기이코노미와의 통화에서 “소비자분쟁해결기준 고시는 한소원에서 분쟁조정시 사용하는 기준 성격이 강하다”며 “분쟁해결을 위한 방향만 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료=한국소비자원>   ©중기이코노미

방향만 제시, 강제력 없는 ‘소비자분쟁해결기준’ 고시

공정위의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 따르면 ▲품질보증기간 이내에 재질이나 제조상 결함으로 고장 발생시 무상수리를 받을 수 있으며 ▲차량인도일 1개월 이내 주행 및 안전도 등과 관련한 중대한 결함에 따른 동일 하자에 대해 3회까지 수리했으나 하자가 재발(4회째)하거나 수리기간이 누계 30일(작업일수기준)을 초과할 경우 제품교환 및 구입가 환급(차령 12개월 이내) 또는 부품교환(차령 12개월 초과)을 해야 한다. ▲수리부품을 보유하지 않아 수리가 불가할 경우 구입가 환급(차령 12개월 이내) 또는 구입가에서 정액 감가상각비를 공제한 금액에 10%를 가산해 환급 또는 제품교환(차령 12개월 초과)을 해야 한다. ▲차량 인도시 이미 하자가 있는 경우 보상 또는 무상수리, 차량교환, 구입가 환급을 받을 수 있고 ▲자동차옵션용품에 하자가 있는 경우 품질보증기간 이내이면 무상수리 또는 구입가 환급 그리고 교환을 할 수 있다.

한소원에 따르면 자동차 피해구제 접수건수는 2013년 765건, 2014년 896건, 2015년 675건으로 최근 3년간 2336건에 이른다. 지난 3년간 연평균 778건에 달하는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 및 기준이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다. 2015년의 경우 675건의 피해구제 신청 사례 중 합의에 이른 경우는 292건(43.3%)으로 절반도 되지 않는다. 이외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한 경우가 81건(12.0%), 취하중지·처리불능 39건(5.8%), 정보제공·상담기타로 종결 263건(39.0%) 순이었다. 소비자들은 정당하게 돈을 주고 자동차를 구입했지만 제대로 된 제품을 공급받지 못함으로써 이중, 삼중으로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국회입법조사처 한 관계자는 “업체들이 평판을 의식해 고시를 지키려 한다지만, 고시가 업체들을 제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업체들이 사실상 구색을 맞추는 수준만 제시하면 소비자는 더 이상 권리를 행사할 방도가 없다”며 “소비자는 업체 제안에 만족하지 못하면 민사소송을 통해 구제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레몬법, 동일결함 4번 불량차 간주해 전액환불·새차 교환

자동차 관련 소비자 권익보호를 위한 법안 기준으로 미국의 ‘레몬법’을 언급한다. 레몬법에서는 임차를 포함한 구입 후 1년 또는 주행거리 1만2000마일(1만9312km)미만 차량에서 똑같은 결함이 4번 발생하면 불량차로 간주해 제작사가 차량가격 전액을 환불하거나 새 차로 교환해 줘야 한다.

이에 대해 입법조사처 관계자는 “레몬법은 출시단계에서부터 발생한 결함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며 “레몬법이 미국에서는 주(州)법으로 적용되고 있어 국내법에 비해 세밀한 수준이다. 이를 국내법에 적용할 수 있느냐는 논란이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국내 자동차시장이 독과점인 상황에서 레몬법과 같은 법안이 발의되면 대기업 반발이 심할 것”이라고 했다.

공정위 고시를 법률에 담아 강제력을 부여하는 경우에도 풀어야 할 숙제는 또 있다. 제품의 결함이나 불량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부담시킬 것인가다. 입법조사처 관계자는 “자동차와 관련된 기업이라고 하면 현대·기아 등 대기업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들 자동차 제조사는 제조업체가 아닌 조립업체에 가깝다”며 “자동차 제조사는 자동차 결함을 조립과정의 책임이 아닌 제조과정의 책임으로 돌릴 가능성이 많다”고 말했다. 제조단계의 문제인지 조립단계의 문제인지를 판가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또 책임 소재를 밝히는 과정에서 하청업체들이 원청의 잘못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법률로써 강제력을 부여할 경우 자동차 제조사와 비교해 상대적 약자인 하청업체들이 보상책임을 떠안을 가능성이 많다.

자동차관리법 개정안 2건 발의…“입법 쉽지 않아”

자동차 소비자 보호를 위한 입법추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대 국회에서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박민수 의원과 새누리당 박덕흠 의원이 리콜조치를 강화한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각각 발의했지만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20대 국회에서도 자동차 소비자 보호를 위한 자동차 관리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지만 법안 통과는 여전히 낙관할 수 없다. 20대 국회에 발의된 법안들은 자동차 결함에 대한 보상방안을 명시하고 있다. 새누리당 이헌승 의원안은 ▲국토교통부에 자동차 안전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기 위한 ‘자동차안전·하자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주요 장치나 부품에 주행 및 안전도 등과 관련한 고장에 대해 3회 이상 수리 후 동일고장 발생 시 국토교통부장관에게 자동차나 자동차부품에 대한 조사를 요청할 수 있으며 ▲국토교통부장관은 자동차안전·하자심의위원회 조사결과 자동차제작·판매자 등이나 부품제작자 등의 고의·과실로 중대하자가 인정되는 경우 자동차나 자동차부품의 교환·환불 등 필요한 조치를 명할 수 있도록 했다.

같은 당 심재철 의원안은 피해구제를 위한 기간과 횟수를 세부적으로 정했다. ▲자동차를 인도한 날로부터 1년 이내 같은 결함을 3회 수리 후 4회째 발생 또는 관련 수리기간이 총 30일을 초과했을 경우 ▲자동차를 인도한 날로부터 30일 이내 주요 장치나 부품에 주행 및 안전도 등과 관련 중대한 결함이 2회 이상 발생했을 경우 ▲자동차를 인도한 날부터 1년 이내 중대한 결함을 2회까지 수리한 후 같은 결함이 3회째 발생했을 경우 자동차제작·판매자 등은 사용자 요청에 따라 자동차를 교환하거나 환불하도록 명시했다. 또 두 법안 모두 법 위반시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해 소비자 피해구제에 대한 강제력을 부여했다.

개정안 모두 자동차관리법을 통해 피해를 구제하는 방안이지만, 자동차관리법의 목적이 자동차의 안전확보 및 효율적 관리인만큼 법체계상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또 소비자피해와 관련된 사안이기때문에 자동차관리법이 아닌 소비자기본법에 넣자는 의견도 있다.

이와 관련 입법조사처 관계자는 “국토부는 자동차관리법을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여기고 있어 개정안이 자동차관리법과 어울리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공정위 소관의 소비자기본법에 넣자니 소비자기본법이 포괄적인데 자동차만 특화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의견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는 “법안을 세밀히 조정해야 통과될 수 있는데, 몇몇 의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19대 국회 이후 쟁점사안이 진전된 바가 없다”며 “20대 국회에서도 개정안 통과를 낙관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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