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으로 추론하면 특정인과 특정집단의 행위와 사고는 예측 가능하다. 특히 예측이란 것이 경험칙을 통하고 논리적인 추론이 곁들여지면 정확도가 더 높아진다. 깊은 내용은 모르지만, 심리학 이외 경제학에서도 경제활동 이외 사람의 행위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분야가 있을 정도다. 박근혜 대통령이 오늘 국무총리와 함께 경제부총리 그리고 국민안전처장관을 교체하는 인사명령권을 발동했다. 특정인의 말만 귀 기울이고, 그 누구의 조언도 듣지 않았던 ‘불통’이 트레이드마크였던 박 대통령으로선 그냥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예측 가능했다는 말이다.

부분 개각에 대해 김성원 새누리당 대변인은 구두논평을 통해 “이번 개각은 위기에 처한 국정을 정상화하기 위한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라며 “이번 개각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며, 야당도 책임있는 자세로 이번 개각에 대해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한다”고 했다. 역시 예측 가능했던 그대로다.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는 무의식적인 사고가 드러나는데 역시 며칠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거국내각, 책임총리, 책임자 문책, 대통령의 2선후퇴 등 새누리당 내에서 벌어졌던 논쟁은 모두 논쟁으로 끝났다.

비선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 및 국기문란 파문과 관련, 국정조사와 함께 특별법에 따른 특검을 추진하기로 합의한 야당의 반응 또한 예측 그대로다. 더불어민주당의 추미애 대표와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은 각각 다른 장소에서 입을 모아 “박 대통령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고 비난했다. 정의당 역시 한창민 대변인의 브리핑을 통해 “분노하는 민심에도 아랑곳 않고 독단적으로 단행한 이번 개각은 국민과 맞서는 최순실 방탄개각이며 대국민 선전포고”라며 “박근혜 대통령의 행태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국민과 함께 끝까지 헌정파괴의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4.16연대, 민주주의국민행동, 백남기투쟁본부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2일 연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즈음한 비상시국회의 및 기자회견’(위)과 같은 날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서울 종로구 청운동 주민센터앞에서 개최한 시국 공동기자회견 모습.<사진=뉴시스>

지난 1일 ‘내일신문-디오피니언’이 실시한 11월 정례 여론조사에서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9.2%다. 지난 87년 군사정권 종식 이후 대통령 중 가장 지지율이 낮았던 김영삼 대통령의 기록(조사시점 기준), 6%를 깰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질 정도다.

국정원이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것이 확인됐고, 법과 원칙에 따라 이를 수사했던 검찰총장과 수사책임자에게 이 정부가 칼을 들이댔을 때도 ‘콘크리트’ 지지층은 미동도 없었다. 수백의 꽃다운 청춘이 바닷물에 빠졌고, 박 대통령이 ‘참회’의 눈물과 함께 했던 약속을 파기했을 때도 콘크리트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청와대 홍보책임자가 방송사에 전화를 해 ‘대통령이 보고 있다’며 언론을 통제하고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려도 콘크리트는 견고했다. 박 대통령 취임 이후 가계부채 증가액이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증가액을 합친 것보다 많고, ‘소비절벽’이 고유명사가 돼도 콘크리트는 단단했다. 부동산가격 폭등, 전월세 대란으로 이곳 저곳을 떠 돌아도 그랬다. 심지어 재벌들의 팔을 비틀어 사실상의 ‘통치자금’을 만들었을 때도 국가와 민족에 대한 박 대통령의 충정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30%대의 콘크리트 지지층이었다.

온갖 악재와 실정에도 이들 콘크리트 지지층이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유는 그 모든 정책결정이 대통령 자신이 결정한 정무적 판단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박 대통령은 국민들이 부여한 국정 총책임자로서의 권한을 포기했다. 정치인 박근혜에게 헌법이 부여했던 대통령의 권한을 최순실에게 이양했다. 법과 원칙을 그토록 강조했던 박 대통령이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더 더욱이 국민들의 동의도 없이. 지지하진 않았지만 선출된 권력으로 인정하고, 제도권 내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이들의 자존과 존엄을 짓밟았다. 그리고 박 대통령에게 한없는 신뢰와 애정을 보냈던 콘크리트층에게 배신과 함께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새긴 것이다.

해방 이후만 보더라도 극단적인 좌우대립, 민족상잔의 비극을 딛고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 국가부도 위기에 고사리 손에 든 돌반지를 모아 재건한 대한민국이기에 잠재된 에너지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양극화에 따른 계층간의 갈등이 다소 심각해도, 가계부채가 급증하고 부동산 투기로 인해 주거가 불안정해도, 사회안전망이 많이 부족해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87년 이후 6번의 대통령선거를 통해 민주적인 국가시스템을 구축했고, 셀 수 없이 많고 이해관계 복잡한 사회적·경제적 과제와 갈등을 국가시스템을 통해 해결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민주적인 국가시스템을 붕괴시켰고 헌법을 유린했고 국민을 배신했다. 아직 갈길이 멀지만 오늘의 경제구조를 만들었던 이른바 ‘산업전사’들의 땀과 눈물의 교훈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밤잠 안자고 기업을 일구고, 일자리를 만들었던 기업인들의 노력을 무위로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의 자격을 스스로 포기했고, 국민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콘크리트가 완전히 붕괴된 현실에서 확인했다.

지난 1일 대전 서구 갤러리아타임월드 앞에서 열린 시민 촛불집회.<사진=뉴시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일부 개각을 통해 다시 한번 권력의지를 드러냈다. 총리내정자를 포함 장관내정자들에 대한 호불호는 관심 밖이다. 국민들은 이미 대통령의 권한을 회수했다. 더 이상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는 ‘참칭’ 대통령에게 내각구성권을 내줄 만큼 우리 국민은 어리석지 않다.

일부 개각을 통해 친정을 행하고자 하는 박 대통령의 이번 행보는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다만 국가와 존엄을 훼손하고 국민들의 자존심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줬기에 ‘이 정도까지 나갈 수 있을까’ 라는 수준의 기대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불통’이 내미는 수습책이란 것이 ‘불통’임을 확인하는데 며칠 걸린 것 뿐이다.

새누리당에 묻는다. 이번 개각이 진정 ‘위기에 처한 국정을 정상화하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믿는 것인지, 그리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지.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여야합의에 의한 책임총리제를 말하고, 철저한 진상조사를 통한 국정쇄신을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다시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 운운하며 ‘박비어천가’를 또 다시 반복하고 있다. 단언하건대 국민의 뜻을 외면하고 박 대통령의 뜻을 따를 경우, 추상같은 국민의 명령과 심판에 의해 새누리당은 해산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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