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아래 첫마을 해방촌 신흥시장은 1968년 당시 ‘현대화 사업’을 했던 모습 그대로 시간이 멈춰있다. 서울 안에 이런 곳이 있나 싶을 만큼 옛시절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해방촌 신흥시장은 1968년 당시 ‘현대화 사업’을 했던 모습 그대로다.   ©중기이코노미

상인 박일성(75)씨는 이곳 신흥시장에서 50년 넘게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 그는 “예전에는 쌀이 귀해서 국수를 많이 먹었지. 여기 신흥시장에서 국수 많이 팔았다”고 말한다. 9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직원을 두고 매일 국수를 만들어도 금새 동이 날만큼 장사는 잘됐다. 그 만큼 이 시장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지금은 봄과 가을 일년에 두번만 국수를 만든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덮힌 어두운 시장 안에 켜켜이 쌓인 국수만큼 많은 이야기를 쌓아두고 있었다.

서울 용산구 용산동에 있는 해방촌은 해방직후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모여살게 되면서 생겨났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움막이며, 판자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그들이 바구니 장사, 보따리 장사를 하며 신흥시장도 생겨났다. 50~60년대엔 일명 ‘담배말이’가 이들의 주 수입원이었다. 불법이었지만 값싸고 질좋은 사제담배는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며 전매청의 대대적인 단속으로 담배마는 사람들도 사라졌다. 70년대 이후에는 인근 남대문시장에 납품하기 위한 봉제산업과 스웨터산업이 가내수공업으로 번창했다. 신흥시장의 부흥기였다.

박일성씨(사진 위)는 신흥시장에서 50년 넘게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 이춘경씨(사진 아래)는 “이 시장에서의 아름다운 시절, 고난의 시절, 젊어서 까불고 돌아다녔던 시절 다 얘기하려면 5일밤을 새도 모자란다”며 웃는다.   ©중기이코노미

이춘경(72)씨는 전쟁통에 가족과 함께 내려왔다고 했다. 북한에서 지역유지였던 부친은 함께 내려오다 북한군에 의해 사망했다. 형은 북에 원수를 갚겠다며 군입대해 전사했다고 전했다. 해방촌에서 자란 그는 “자전거로 계란 팔고 쌀 팔아, 아이들 대학보내고 시집보내고 했다”고 말한다. 고등학교를 나와 한때 잡지사 기자도 했다는 그는 수습기간동안 욕먹고 혼나는게 싫어 그만뒀다. 그러다 이곳 신흥시장에서 25만원으로 채소 장사를 시작했다. 25만원어치 채소를 사서 팔면 30만원이 됐고, 다시 30만원어치 사다 팔면 37만원이 됐다. 조금씩 이윤이 늘어나는 재미에 이곳을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때마침 딸아이가 태어났고 악착같이 장사를 했다. 그는 “이 시장에서의 아름다운 시절, 고난의 시절, 젊어서 까불고 돌아다녔던 시절 다 얘기하려면 5일밤을 새도 모자란다”며 웃는다.

한 때 영화를 누렸던 이곳 신흥시장에서 옛모습 그대로 장사를 하고 있는 점포는 이제 전체 40여개중 국수가게, 잡화점, 횟집, 순대국집, 옷 수선집, 반찬가게 등 6개가 전부다. 빈 점포가 대부분이고 빈 점포 중 10개는 값싼 주거공간으로 임대하고 있다.

한때는 상인들이 모여 이야기 꽃을 피웠을 시장 중앙 평상. 이제는 영화 세트장같은 적막함만 남았다.   ©중기이코노미

묵은 때 벗고 ‘아트마켓’ 재탄생…“공방보다는 가게 많았으면”

신흥시장은 이제 묵은 때를 벗고 새로운 시장으로 재탄생한다.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6개의 도시재생사업 지역에 이 해방촌이 포함돼 있다. 6개 재생지역 중에서도 시장은 신흥시장이 유일하다. 서울시는 이 신흥시장을 해방촌 신흥시장 아트마켓으로 꾸밀 계획이다. 서울시는 10억원을 들여 시장 위를 덮고 있는 어둡고 유해한 슬레이트 지붕을 걷어내고 현대식 지붕을 새로 덮는다. 시장 바닥도 새로 정비한다. 해방촌의 지역기반 사업이었던 니트산업을 재조명하고, 청년들이 중심이 된 예술공방을 결합해 50년만의 재도약을 꿈꾸는 것이다.

이르면 내년 초 아트마켓의 모습이 드러날 예정이지만, 이미 지난 9월 방송인 노홍철씨가 신흥시장 안에 ‘철든책방’이라는 서점을 열었다. 가수 정엽씨는 카페를 오픈할 예정이며, 방송인 김제동씨도 이 시장에 공간을 마련한다. 문화예술인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모습이다.

해방촌 도시재생사업을 주관하고 있는 용산구청 ‘해방촌 도시재생지원센터’ 김지훈 주무관(사진 위)은 “시장의 모습을 어떠한 형태로 보존할 것인가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숙제”라고 했다. 건축사무소 ‘스튜디오 정미소’ 허길수 대표(사진 아래)는 비어있는 상가공간을 임대해 해방촌 4평학교라는 마을공동체를 만들었다.   ©중기이코노미

해방촌 도시재생사업을 주관하고 있는 용산구청 ‘해방촌 도시재생지원센터’ 김지훈 주무관은 “시장의 모습을 어떠한 형태로 보존할 것인가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숙제”라며 “무엇보다 기존 상인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또 시장으로서의 기능이 되살아날 수 있도록 청년들의 채소가게, 생선가게, 과일가게 등을 입주시키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시는 지난 8일 상가 소유주와 임차인·용산구와 함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방지를 위한 상생협약을 체결하고 신흥시장의 임대료를 6년간 동결하는데 합의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상권이 뜨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거주하던 세입자들은 결국 임대료를 감당 못해 떠나는 현상을 말한다. 이를 막고자 합의했지만, 이 일대는 이미 부동산 가격과 임대료가 상당히 높은 편이어서 그 실효성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1년전부터 이곳에서 양초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황혜인(34)씨도 시장재생사업에 거는 기대가 크다.   ©중기이코노미

1년전부터 이곳에서 양초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황혜인(34)씨도 시장 재생사업에 거는 기대가 크다. 그는 임대료가 저렴해 이곳에 가게를 냈지만 시장을 찾는 사람이 없어 인터넷을 통해 매출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10년 넘게 반찬가게를 운영해 온 이순자(66)씨는 “리모델링하면 깨끗해지고 좋지만, 시장에 공방이나 예술하는 사람이 들어와봐야 우리한테 득되는 것이 있을까 의문”이라며 “실제로 물건을 살 사람이 많이 올수 있도록 야채가게나 생선가게 등의 점포가 들어왔으면 한다”고 바랐다.

지금까지 해방촌 신흥시장을 만들고 꾸려온 이들의 이야기는 이제 역사자료가 돼 사람들에게 읽히게 될 것이다. 그들의 시장은 물건이 아닌 사람과 역사·문화를 파는 시장으로, 사람들이 만나 공동체 생활을 만들어가는 광장으로 남는다. 새로 들어오는 해방촌 사람들은 50년 후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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