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소비자들이 직장에서 퇴근한 후나 휴무일 쉴 때, 대형마트·백화점·면세점 등에서 근무하는 유통서비스 근로자는 더 바쁘다. 이 때는 다리가 저려와도, 화장실이 급해도, 아이가 아파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게 현재 유통서비스 근로자의 현실이다. 2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유통서비스 노동자의 노동실태와 법·제도 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증언대회’에 참석한 이들 근로자들은 “삶의 질을 보장받지 못하고 건강권을 침해당하는 환경에서도 생계를 위해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종진 연구위원이 이날 발표한 자료를 보면, 유통서비스 근로자 중 근속연수 1년미만 근로자가 35.5%다. 이처럼 이직률이 높은 이유는 장시간 근로 때문이다. 유통서비스 근로자 가운데 1주 52시간 근로를 초과하는 비율은 17.6%에 이른다.

일반소비자 쉬는 날 연장영업…3명 중 1명은 근속연수 1년미만

2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유통서비스 노동자의 노동실태와 법·제도 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증언대회’에 참가한 근로자들은 장시간 근로로 인해 삶의 질이 떨어지고, 건강권을 침해받고 있다며 개선을 촉구했다.   ©중기이코노미

대형마트의 경우 오전·오후조로 나눠져 있지만, 오전조의 경우 오후조의 식사시간을 위해 연장근무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에 2주에 한번 열리는 행사때면, 영업마감 시간인 자정을 넘기기 일쑤다. 그나마 대형마트는 매월 이틀에 더해 공휴일은 의무휴업하고, 0시에서 10시 시간대에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있지만, 면세점이나 백화점은 이에 해당되지 않아 영업시간이 점점 늘어가는 추세다.

면세점에서 근무하는 한 근로자는 “현재 근무하고 있는 면세점의 경우 2004년 입사당시 폐점시간이 오후 7시반이었는데 현재는 9시까지 늘어났다”며 “면세점측은 처음에 일시적으로만 시행하는 것이라 했지만, 조금씩 늘려갔다”고 말했다. 백화점의 경우 오픈 시간이 보통 오전 10시반부터 오후 8시까지인데, 오픈·마감 준비시간을 30분씩만 추가해도 근로시간은 10시간을 넘는다. 이 또한 평일 기준이다. 주말이나 재고조사 시 이 보다 한시간 가량 퇴근이 늦어진다. 거기다 백화점 근로자는 교대근무가 아닌 전일제근무다.

명절이나 공휴일 등 일반 소비자가 쉬는 날, 쉰다는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오히려 연장영업을 해야 하는 형편이다. 또 대형마트와 달리 백화점이나 면세점은 의무휴업일도 없다. 토론회에 참석한 마트 한 근로자는 “명절에는 하루 5시간씩 연장근무를 하기도 한다”며 “인원을 충원하지 않고서 연장영업을 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오고 골격계질환을 호소하는 근로자가 다수”라고 밝혔다.

선진외국은 그렇지 않다. 백화점, 면세점, 쇼핑몰에 대해 공휴일엔 의무적으로 휴업하도록 하고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일요일에는 오전 10시에서 오후 6시간만 영업하도록 했다. 이탈리아는 일요일과 공휴일은 영업금지, 주중의 경우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만 영업을 할 수 있다. 프랑스도 주중에는 오후 10시까지만 영업이 가능하다. 독일은 더 나아가 지자체 규제로 모든 상점이 평일과 토요일에는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 개점하며, 일요일과 공휴일은 문을 열지 않는다. 독일이 이런 법을 시행하는 이유는 ‘유통업체 종업원 휴식권 보장 및 가정생활 보호’를 위해서다.

이날 여성근로자들은 “장시간 근로로 인해 육아에 어려움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중기이코노미

“집중근무시간이라며 휴게실 문 까지 잠그는 백화점”

장시간 근로는 몸에 무리를 주기 마련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종진 연구위원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근골격계 질환증상으로 의사진료가 필요한 근로자가 설문조사 응답자 3470명 중 1551명(44.7%)에 이른다. 10명 중 1명은 근속 1년 이내에 업무상 질병 또는 신체적 손상을 경험하기도 했다. 여성들의 경우 하혈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얘기도 나왔다.

장시간의 근로시간을 조절할 수 없다면 보장된 휴게시간과 공간이라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형마트와 면세점, 백화점에 휴게공간이 제대로 확보된 곳도 드물다.

롯데 면세점 화장품 매장의 한 근로자는 “근무지는 9층인데 휴게실은 2층에 위치해, 잠깐의 휴게시간에 휴게실을 이용하기 어렵다. 또 면세점 직원은 1000명인데, 휴게실은 방 한칸에 불과하다. 직원 휴게실이 없는 채 오픈하는 면세점도 있다”고 말했다. 이마저도 제대로 이용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한 백화점의 경우 3시에서 6시 사이를 집중근무시간으로 정해놓고 이 시간동안 휴게실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아예 문을 잠궈놓기도 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근로자들은 비상계단에서 쉬거나 소비자의 눈에 띄지 않는 공간을 찾아 그나마 쉴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유통서비스 근로자들의 근무지 시설 만족도는 매우 낮다. 김 연구위원이 조사한 유통서비스 근로자 휴게실 만족도 결과를 보면, 휴게실 의자 및 비치물품에 대한 만족도는 100점 만점에 평균 34.8점, 휴게실 공간은 32점, 휴게실 위치는 36.3점이 나왔다. 휴식시간 중 휴게실 이용 여부는 37.8점, 피크타임 휴게실 사용가능 26점이다. 전반적으로 휴게실이 갖춰져 있어도 사용이 여의치 않은 것이다. 또 필요시 의무실 이용가능 여부는 37.5점에 불과하다.

롯데면세점 소공동점 9층의 경우 화장실이 1개가 있다. 미국 노동부 산하의 직업안전 위생관리국은 직원 수에 따른 화장실 수까지 직업 안전 및 보건 법령(OSHA)으로 규정하고 있다. 소공동점 9층 80개 매장에서 근무하는 직원을 2명으로 가정해 이 규정에 적용하면, 화장실은 6개를 설치해야 한다.<자료=롯데면세점 홈페이지>

생리현상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 백화점이나 면세점 화장실의 경우 대부분 매장 깊숙한 곳에 그나마 한 두개만 있을 뿐이다. 멀리 떨어진 매장의 직원들은 갈 엄두도 내지 못한다. 김 연구위원의 자료에 따르면, 방광염 치료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가 5명 중 1명이었다. 보육을 위한 어린이집과 수유실은 아예 없어 여성근로자들이 남자들과 함께쓰는 창고를 이용하기도 했다.

김종진 연구위원은 “지난 2015년 11월19일 나온 대법원의 대형마트 영업규제 판결을 보면, 근로자의 건강권 보호가 그간 경제민주화 이슈였던 중소유통업과의 상생발전보다도 먼저 나온다. 또 근로자 건강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며 “유통산업발전법으로 영업시간을 현재보다 제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나아가 전체 근로자의 삶의 질과 건강권을 위해 근로자의 안전과 보건을 유지·증진함을 목적으로 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20대 국회에서 이들 유통업체에 의무휴업일을 부여하고 영업시간을 줄여 근로자의 건강권과 삶의 질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무소속 김종훈 의원은 지난 11월 현재 대형마트만 포함돼 있는 의무휴업일을 백화점과 면세점까지 포함하는 ‘유통산업발전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발의안을 보면 ▲대형마트 및 준대규모점포는 매주 일요일 또는 이해당사자와 합의한 경우 일요일이 아닌 날 ▲백화점은 매주 일요일 ▲면세점은 매월 일요일 중 하루를 의무휴업일로 지정하도록 했다. 또 특별자치시장·시장·군수·구청장이 ▲대형마트는 오후 10시부터 익일 오전 10시 ▲백화점과 면세점은 오후 8시부터 익일 오전 9시 ▲공항과 항만에 소재한 면세점은 오후 9시30분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의 범위 내에서 영업시간을 제한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 20일 발의한 더불어민주당 서영교 의원안은 설날과 추석이 있는 달에는 사흘을 의무휴업일로 지정하고, 설날과 추석 당일은 반드시 의무휴업일로 지정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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