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진국 미술평론가, 종합인문주의 정치비평지 ‘말과활’ 편집위원

2016년 12월31일에 떠오른 태양과 2017년 1월1일에 떠오른 태양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을 텐데도 우리는 2017년의 태양을 새로운 시작의 상징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한 해도 열심히 뛰어보겠다고 열정을 불태운다. 태양은 우리에게 강인함을 심어준다. 특히 새해에 바라보는 태양은 기대감을 더해준다. 2017년 희망의 태양을 떠올리며 문득 예술이 태양을 집어삼켰던 때가 기억났다. 바로 2003년 런던에서 있었던 일이다. 테이트 모던은 태양을 집어삼켰다.

유사 자연(Artificial Nature)의 미술

서울 한남동에 있는 삼성미술관 리움에서는 거의 매일 무지개가 떠(?) 있다. 별문제가 없다면 이 무지개는 아마도 2017년 2월26일까지는 거의 매일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 무지개는 신(자연)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이라는 덴마크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가 만든 것이다. 현재 리움에서는 그의 전시 ‘세상의 모든 가능성(The parliament of possibilities)’이 진행 중인데, 이 전시에서 그는 안개처럼 미세하게 뿌려지는 물방울들이 빛과 만나서 무지개를 만드는 작품(무지개 집합, 2016)을 선보이고 있다. 인공 무지개를 만들어낸 이 작가 올라퍼 엘리아슨은 바로 2003년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태양을 띄운 작가이기도 하다.

올라퍼 엘리아슨, ‘날씨 프로젝트’, 2003년 전시.<자료=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안개의 도시 런던은 1년 중 절반 정도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로 유명하다. 그 때문일까, 런더너(Londoner)의 태양 사랑은 익히 알려져 있다. 2003년, 많은 사람은 일광욕을 즐기기 위해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의 터빈 홀에 떠오른(?) 태양으로 끊임없이 몰려왔다. 이것만으로도 그들의 태양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 당시 터빈 홀에는 런던의 안개처럼 자욱한 수증기가 공간을 채우고, 200개의 소듐램프를 품고 있는 지름 15m의 반원형 철제 프레임이 천장에 설치된 거울에 의해 완전한 원형을 이루며 이글거리는 태양의 모습으로 빛을 뿜고 있었다. 실로 이 인공 태양은 유사 자연의 결정판이었다. ‘날씨 프로젝트(The Weather Project)’라 명명된 이 전시회가 열렸던 터빈 홀은 인공 태양을 느끼기 위한 관람객으로 항상 북적거렸다. 그곳은 이미 거대한 일광욕장으로 변모해 있었다.

사실 ‘날씨 프로젝트’에서 인공 태양만큼 중요한 것은 터빈 홀에 있는 관람객이었다. 그들은 인공 태양 아래에서 바닥에 눕거나 앉거나 춤추거나 이야기를 나눴다. 커플들은 서로 포옹도 했고, 어떤 이는 천장의 거울에서 자신의 몸을 찾으며 놀았다. 인공 태양은 이 전시의 하나의 상징일 뿐 정작 중요한 것은 관람객의 ‘참여(Involvement)’를 통해 작품(유사 태양)과 관람객 사이, 관람객과 관람객 서로 간의 감정적 공유와 소통이었다.

엘리아슨은 단순히 인공 태양만 작품으로서 덩그러니 놓아 말 그대로 관람만 하며 주관적인 사적 감정에 머물러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가 인공 태양을 통해 끌어내려고 했던 감정은 작품 속에 참여하여 다른 사람과 함께 그 공간을 경험하고 느끼는 공유 가능한 공적 감정이었고, 그 감정의 소통을 원했던 것이다. 이것이 엘리아슨이 추구하는 모두를 위한 미술이다. 엘리아슨의 태양 아래 모인 관람객은 일시적이나마 공동체적 감정을 공유하는 마법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날씨 프로젝트’를 진정한 작품으로 완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올라퍼 엘리아슨, ‘날씨 프로젝트’, 2003년 전시.<자료=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세상의 모든 가능성

엘리아슨은 태양뿐만 아니라 무지개, 별, 폭포, 바람 등 비물질적인 자연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한다. 빙하를 도심 한가운데 가져다놓기도 했고, 녹색 물감을 바다에 풀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그 비물질적 자연을 많은 사람과 함께 공유하길 희망한다. 그의 작업이 자연에 대한 사유로 수렴되는 것은 덴마크에서 태어났지만, ‘얼음과 호수의 나라’ 아이슬란드에서 광대한 자연을 느끼며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리라. 그는 자신이 느꼈던 그 자연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번에 그는 무지개를 가지고 우리나라를 찾았다. 무지개뿐만 아니라, 이끼도, 폭포도, 별들도, 바람도 함께 가지고 왔다. 전시의 제목처럼 그는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가 가져온 자연은 전시장 리움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그것 중 역시 가장 주목되고 있는 것은 무지개다.

천정의 분무기가 뿜어내는 미세한 물방울들이 프레즈널 램프의 빛을 받아 영롱한 무지개로 변하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단지 무지개만이 아니다. 2003년 인공 태양이 있는 테이트 모던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지개의 존재만큼이나 무지개 속을 거니는 체험 행위가 중요하다.

엘리아슨은 이전 작업에서도 관람을 넘어서 체험하고 그걸 공유하길 원했다. 전시장 옆에 높인 우산들은 그의 이러한 의지를 소리 없이 외치고 있다. 함께 우산을 쓰고 무지개 속으로 들어가라고 노래한다. 이 노래에 화답하여 원형 띠를 이루고 있는 무지개 사이를 거닐면 시원하고 촉촉한 물의 감촉과 오로라 같이 일렁거리는 현란한 빛의 변주가 느껴진다. 희망의 상징인 무지개를 비 온 뒤 가끔 손에 닿지 못하는 하늘 위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손에 잡을 수 있는 눈앞에서 항상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가까운 곳에 언제나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올라퍼 엘리아슨, ‘날씨 프로젝트’, 2003년 전시.<자료=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전시는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감정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그 이전의 감정이 어떤 모양일까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엘리아슨에게는 단순히 유사 자연으로서 무지개를 재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내면적으로 느끼게 되는 자연에 대한 감정의 모양을 밝히는 것. 그는 이 감정의 모양을 닫힌 미술관에서 내밀하게 사적으로 간직하기보다는 열린 미술관에서 공유하고 확산하길 원했다. 그래서 “미술관이 미래를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고 말했으리라.

‘세상의 모든 가능성’ 전시에는 무지개 외에도 아이슬란드의 노란 순록 이끼가 벽을 이룬 ‘이끼 벽’도 있고, 암흑 같은 검은 배경에 1000여 개의 다양한 유리구슬이 마치 우주의 성운(星雲)을 이룬 것 같은 ‘당신의 예측 불가능한 여정’도 있고, 중력을 거슬려 역류하는 폭포를 보여주는 ‘뒤집힌 폭포’도 있다. 이 전시에는 유사 자연 작품 외에도 빛과 움직임이나 거울을 이용한 다양한 착시효과 작품과 색채 실험을 통해 감정을 흔드는 작업도 있다. 시간이 허락하면 2월26일 이전에 삼성미술관 리움에 방문하길 권해본다.

2003년 엘리아슨의 태양이 태양을 사랑하는 런더너에게 언제든 사랑을 느끼게 해줬다면, 2017년의 엘리아슨의 무지개는 희망을 바라는 우리에게 희망이 늘 바로 옆에 있음을 일깨워준다. 새롭게 2017년이 밝았다. 새해의 태양이, 희망의 무지개가 2017년 내내 우리와 함께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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