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번의 실패 끝에 태어나다 “변치 않는 색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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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번의 실패 끝에 태어나다 “변치 않는 색채” 세계를 누빈 ‘메이드 인 코리아’ 물감…알파색채㈜ 남궁요숙 회장

기사입력2016-12-31 00:00

채민선 기자 (iscra79@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알파색채 남궁요숙 대표<사진=알파색채>

그는 일제시대와 6·25 등 격변의 역사를 넘나들며 세 시간 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내내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카리스마를 내뿜었다. 88세로 국내 최고령 여성CEO인 알파색채㈜ 남궁요숙 회장. 알파색채는 1962년 설립해 우리나라 최초로 전문가용 미술재료를 만든 회사다. 서울 평창동에 있는 알파색채 사옥을 중기이코노미 기자가 방문한 날, 남궁요숙 회장은 집무실에서 공장장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알파색채의 김영훈 부사장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며 “지금도 매일 아침 4개의 경제신문을 다 보고 스크랩 해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있다”고 남궁 회장을 소개했다. 남궁 회장 차남의 절친한 친구이자 젊은 시절부터 알파색채에 몸담아 온 김 부사장이 몰래 찍었다며 보여주는 사진 속에는 해진 곳을 여러 번 기워 입은 남궁 회장의 내복과 양말이 있었다. 남궁 회장의 검소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본 물감에 의존하는 현실 화가 나” 물감연구 시작

“세계적인 명화들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은 변하지 않고 작품의 원색을 보존해주는 질 좋은 물감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남궁 회장은 알파색채가 생산하고 있는 물감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부터 대단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색이 변하는 정도를 실험하는 퇴색용지를 기자에게 보여주며, 알파색채의 제품과 수입제품의 퇴색정도 차이를 설명해 줬다. 30여년의 시간동안 색이 변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실험으로 한 눈에 봐도 알파색채 물감의 색감은 우수했다.

서울 평창동 알파색채 공장에서 물감을 생산하고 있는 모습. ©중기이코노미

남궁 회장은 미술을 전공하거나 미술을 업으로 하진 않았다. 남궁 회장과 남편인 故 전영탁 회장이 국내기술로 전문가용 그림물감을 만든 배경에는 당시 일본 물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반영됐다. 독립운동가 남궁억 선생의 5촌 조카이며 개화한 지식인층의 부모 아래서 교육을 받은 남궁 회장은 독실한 기독교 환경에서 자랐다.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과는 사돈집안이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어린시절을 보낸 남궁 회장은 유복한 가정이었지만 일제에 의해 재산을 강탈당해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 했다.

남궁 회장은 이천 양정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그곳에서 남편 전영탁 회장을 만난다. 故 전영탁 회장은 일본 중앙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다. 결혼 후 부부는 약국을 열었다. 당시에는 국산 약보다는 미국에서 구호품으로 들어온 약이 인기가 많아 많이 팔렸다. 부부가 원효로 시장입구에서 운영하던 고려약방은 먼 곳에서도 찾아올만큼 장사가 잘 됐다. 하지만 의료법이 개정되면서 약사면허가 있어야 약국운영을 할 수 있게 되자 부부는 다른 사업을 구상했다.

‘좋은 사업 아이디어 있으면 연락바람’ 부부가 신문광고로 낸 문구였다. 당시 사업 아이템은 있지만 자금이 없어 자금이 필요했던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왔다.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찾지 못하던 중 한 그림물감 제조 기술자가 찾아왔다. 변변한 국산 물감이 없던 시절 미술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국내 제품보다 10배 이상 비싼 일본 물감을 사용해야 했다. 남궁 회장 부부는 일본 제품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이 화가 났다.

화학을 전공한 故 전영탁 회장은 그때부터 물감연구를 시작했다. 활달한 성격의 남궁 회장은 회사 운영과 마케팅 등을 맡았다. 1962년 그렇게 그림물감을 생산하기 시작한 알파색채는 50여년 동안 최고의 국산물감을 개발하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국내 미술재료 시장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

1969년에는 국내 최초로 전문가용 포스터컬러인 ‘알파700’을 개발했다. 당시 교수들과 화가들의 요청으로 12색에 한정돼 있던 색 구성에 핑크, 스카이블루, 보라색을 추가하고 최고급 안료만을 사용해 일본보다 품질이 앞선 15색 제품을 탄생시켰다. 700번의 실패 끝에 탄생한 제품이라 제품명이 알파700이다.

알파색채 남궁요숙 회장은 국내 최고령 여성 CEO다. ©중기이코노미

70년대까지만 해도 미대입시를 치르는 학생들은 비싸면서도 품질이 떨어지는 일제물감을 사용하고 있었다. 알파색채는 미술교사 및 한국미술협회와 당시 문교부의 추천을 받아 외제수성물감 수입금지법을 요청했다. 외산물감이 필요 없을 만큼 알파색채 제품의 품질이 높다는 시험평가를 토대로 마침내 1975년 4월 수입금지 품목에 ‘외제수성그림물감’이 추가되면서 경영이 안정화됐다. 특히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까지 품질개발에 몰두하면서 국산물감을 세계로 수출하는 성과를 낸다.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어려울수록 원칙 지켜

그러나 1981년 세법 개정으로 소득자자진신고제가 시행되며, 세금계산서를 발행하기 꺼리는 업체들과의 마찰로 알파색채는 위기를 맞았다. 당시 물감시장 90%를 점유한 알파색채는 세금계산서 100% 발행이라는 원칙을 고집했고, 그 때문에 거래처로부터 외면당하며 경영위기에 처했다.

“세금을 똑바로 내야 합니다. 세금을 제대로 안내고, 똑바로 안 써 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입니다.”

남궁요숙 회장은 어려울수록 원칙을 고수했다. 이러한 신념은 충성고객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게 되면서 기업이미지도 향상됐다.

알파색채에서 생산하는 제품들. 왼쪽부터 디자인마카, 아크릴컬러, 한국화물감, 포스터컬러<사진=알파색채>

이제 세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알파색채 브랜드를 찾아볼 수 있다. 불모지였던 국내 미술재료 산업에서 우리 이름으로 만들어낸 알파물감. 전 세계 50여 국가의 바이어들이 기술력을 인정하고 먼저 찾아오는 등 이러한 성과의 이면에는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남궁 회장의 정직과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