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일상에서 사용하는 소비제품으로 다수의 소비자가 피해를 입는 경우, 소비자 자신이 그 피해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혹 알았다 해도 권리구제 방법을 알지 못해 구제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권리구제 방법을 알아도 비용·시간 등을 이유로 피해를 감수하고 그냥 넘어가곤 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국내 치약 제조업체 10곳의 149개 제품에서 가습기 살균제 성분의 일종인 메칠클로로이소치아졸리논과 메칠이소치아졸리논 혼합물을 발견해 지난 9월 리콜조치를 내린 사례가 대표적이다. 식약처에 따르면 이들 회사의 치약을 사용한 국민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권리구제 방법이 마땅치 않아 ‘피해를 감수’했다.

18대 대선 당시 불공정거래 행위에 대해 집단소송제를 도입하겠다고 했지만, 인수위를 거치면서 증권거래법 상 집단소송제 개선으로 바뀌었다.<자료=새누리당, 공정거래위원회>

다수의 피해자가 입은 손해에 대해 권리를 구제하는 방법이 집단소송제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12년 대선에서 경제민주화 공약으로 집단소송제 도입을 약속했다. 그때 집단소송제를 도입했다면, 치약제조사들이 치약에 ‘가습기 살균제 성분’을 넣는 무모하고 부도덕한 짓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해줄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인 집단소송제 도입은 이제 차기정부 몫이 돼버렸다.

폭스바겐 사태의 교훈…정보의 비대칭과 집단소송제 유무

집단소송제도 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은 최근 사례는 가습기 살균제와 폭스바겐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광범위한 피해자가 발생했고, 정보의 비대칭으로 피해입증이 어렵다는 공통점이 있다.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에 따르면, 특히 폭스바겐 사태의 경우 미국에서는 17조원 규모의 배상에 합의한 반면 국내에서는 배상계획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폭스바겐이 미국에서 17조원 배상을 결정한 이유 중 하나는 집단소송제의 존재다. 미국의 집단소송제 시스템에서 폭스바겐이 패소하는 경우 17조원 아니 그 이상의 천문학적 규모의 손해배상비용을 부담해야 할지도 모른다. 집단소송 제기에 앞서, 폭스바겐이 합의를 결정할 수 밖에 없고 이에따라 합의금도 올라갈 수밖에 없다.

반면 한국에서 폭스바겐이 미국의 경우처럼 서둘러 합의를 할 이유가 없다. 집단소송제가 없는 한국에서 피해자 개인은 각각의 판단에 따라 폭스바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재판 결과에 따라 보상 또는 배상을 받는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스스로 입증하고 손해배상액을 산출해야하기 때문에 비용도 문제지만 소송제기 자체가 어렵다. 국내 피해자들을 모아 소송에 나섰던 법무법인 바른에 따르면, 소송에 참여한 피해자들은 지난해 8월10일 기준 4742명이다. 이는 환경부가 2015년 11월 리콜조치를 내린 12만5522대의 3.7%에 불과하다. 집단소송제가 있었다면, 폭스바겐이나 가습기 살균제 사건 진행은 지금과 판이했을 것이고, 지금쯤이면 피해자들에게 만족할만한 배상이 이뤄지고 사건은 일단락될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17조원의 배상계획을 발표한 폭스바겐은 집단소송제도가 없는 한국에서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사진은 서울에 있는 폭스바겐 한 매장. 기사의 특정내용과 무관.   ©중기이코노미

중기이코노미 취재과정에서 경제정의실천연합 경제정책팀 권오인 팀장은 “집단소송제가 있었다면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과 권리구제에 상당한 도움이 됐을 것”이라며 “피해자에 대한 보상도 달랐겠지만, 무엇보다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 자체가 줄었을 것이다. 기업들이 천문학적 손실을 감안해 상당히 조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집단소송제는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함께 소비자의 피해를 사전에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얘기다.

논의만 17년째 국회서 막혀…기업위축·소송남발 우려 제기

집단소송제 도입 논의는 최근의 일이 아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2013년 4월에 발표한 업무보고를 보면, 이미 집단소송제 도입 필요성을 언급했다. 또 박근혜 후보가 집단소송제 도입 공약을 발표하기 이전, 공정위가 2011년 12월에 발표한 업무계획에도 집단소송제를 거론한다. 이보다 앞서 1999년 ‘한국경제 중장기비전 시장경쟁부문 공청회’에서도 집단소송제는 나온다. 중기이코노미 취재결과, 17년전에도 집단소송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얘기다.

경실련 권오인 팀장은 “그간 양상을 보면 국회에서 막혔다. 19대에서도 법안이 발의됐지만 여당이 발목을 잡아 통과되지 않았고, 국회 전반적으로 의지가 부족한 것 같다”며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한차례 거센 바람이 불었고, 20대 국회가 여소야대로 구성된 만큼 지금이 집단소송제를 도입하기 위한 기회가 아닌가 싶다”고 했다.

집단소송제가 소비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까지 도입하지 못한 이유는 기업활동이 위축된다는 주장 때문이다. 집단소송제로 인한 손해배상 범위를 예측하기 어렵고, 기업으로서는 불측의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배상액이 과다해 기업이 문을 닫을 정도로 책임이 돌아갈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에대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김성진 변호사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 집단소송제의 기본은 Opt-Out 방식이지만 Opt-In과 절충한 중간 형태로 도입할 수도 있다”고 중기이코노미에 밝혔다. 집단소송제와 다중당사자소송제의 절충형태를 도입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집단소송제도와 다수당사자소송제도는 피해자가 다수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집단소송제하에서는 다수의 피해자 중 일부가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해 판결을 받으면,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피해자들에게도 판결의 효력이 미친다. 반면 다수당사자소송제는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에게만 적용되며,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피해자는 따로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똑같이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피해자라도 집단소송제에서 ‘나는 판결의 효력을 적용받지 않겠다’는 ‘Opt-Out’이 가능하고, 다수당사자소송제에서는 ‘나도 판결의 효력을 적용받겠다’는 ‘Opt-In’이 가능한 것이다.

김성진 변호사가 제시한 절충방식은 집단소송이 제기된 경우 피해자들의 참가를 전제로 판결의 효력이 미치도록 하고, 참가기한을 사실심인 고등법원 변론종결시로 제한하자는 내용이다. 기업이 우려하는 손해배상 범위를 고등법원 변론종결시점에 확정, 기업의 예측이 어려운(불측) 손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료=국회>중기이코노미

기업활동 위축 외 우려하는 또 하나는 소송의 남발이다. 미국의 경우 집단소송만을 전담으로 맡는 변호사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국내의 경우 이런 우려는 말 그대로 우려에 지나지 않는다. 국회입법조사처의 ‘2016 국정감사 정책자료’를 보면, 증권거래법에 집단소송제가 도입된 이후 집단소송이 제기된 건수는 2016년 8월 기준 11건이며, 그나마 소송허가가 난 사건은 단 3건이다. 오히려 집단소송제의 형해화 바꿔말해 유명무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권오인 팀장은 “집단소송제가 말 그대로 피해자를 묶어서 하는 것인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소송 건수를 줄인다고도 볼 수 있다”며 “발의된 법안에 그런 면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또 그 부분은 법원에서 판단할 문제인데, 기업이 너무 앞서 우려를 표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송남발 우려와는 반대로 집단소송제 문턱을 낮추기 위해 입증책임을 기업에 부담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처럼 피해 입증에 필요한 대부분의 정보가 기업에 있는 경우가 많다. 소비자로서는 정보접근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현행 공정거래법 제56조는 공정거래법 위반을 이유로 한 손해배상책임을 물을 경우 사업자가 무과실을 입증하도록 하고 있다. 앞으로 도입될 집단소송제의 경우 이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현재 20대 국회에서는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의 ‘집단소송법안’과 무소속 서영교 의원의 ‘소비자집단소송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박영선 의원안은 민소소송법 특례로서 집단소송제를 추가해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한 경우 소송요건만 충족하면 집단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서영교 의원안은 소비자기본법이나 제조물책임법,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등 다른 법에 따라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경우에만 집단소송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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