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들은 경영권 세습에 집착하여 불공정행위가 더욱 심해지고 있고, 창업과 혁신의 생태계가 무너지며, 우리경제는 재벌대기업들이 지배하고, 힘을 남용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됐다. 과감한 시장개혁을 추진하여 공정한 거래와 경쟁이 펼쳐지고, 시장참여자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와 정당한 보상이 돌아가는 시장이 조성되도록 하겠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의 발언이 아니고, 문재인·안철수 대선후보의 말도 아니다. ‘합리적 보수’를 자임하며, 이번 ‘탄핵대선’에 나선 유승민 바른정당 대선후보의 공약이다. 관행화된 재벌총수들의 불법·탈법에 분노하고, 재벌대기업의 불공정행위가 산업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공약이다. 지금까지의 정치인, 유승민의 정치행보와는 상당히 결이 다른 공약이지만, 대선후보 유승민이 지향하는 경제체제는 자유시장경제임을 알 수 있다. 보수로 화장한 극우세력이 지금까지 고수했던 1% 특권층, 0.1% 대기업에만 자유가 보장되는 시장경제가 아닌 우리 헌법이 지키고자 하는 자유시장경제체제다.

여론조사에서의 낮은 지지율과 무관하게 ‘보수주의자’ 유승민 후보 개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이유다. 유승민 후보의 안보관 특히 대북문제 해법에 대해 상당히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산업경제정책에 대한 유승민 후보의 그림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주요 대선후보 5명이 참여, 최근 두차례 진행된 TV토론회 성적표가 좋은 이유이기도 하다. 학부형도 아니면서 유승민 후보의 높은 성적이 반갑다. ‘아(我)’와 ‘적대관계’라고 판단했던 ‘타(他)’의 내면에도 ‘아(我)’가 존재할 수 있음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인 ‘아(我)’와 ‘타(他)’간의 관계가 적대적이 아닌 상호보완과 협력을 통해 동반자관계로 발전할 때만이 우리 공동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돌아보면, 특정 개인의 정치·사회·경제·문화에 대한 시각 전체를 통으로 묶어 개혁과 보수로 구분하고 특정인에게 ‘타(他)’란 딱지를 붙였다. 특정인이 일단 ‘아(我)’가 아닌 ‘타(他)’로 규정되는 순간, ‘아(我)’와의 교집합 부분을 깡그리 외면한다. ‘아(我)’와 ‘타(他)’간 동질성이라곤 눈꼽 만큼도 없으니 상호간 비난만이 난무하고, 양자간의 타협지점은 찾기 어렵다. 단순화시켰지만 해방 이후 오늘까지 여전한 이른바 ‘좌우’ 진영논리와 지역감정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아(我)’가 ‘타(他)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을 만날 수 있다.

유승민 후보는 대선공약을 통해 비정규직 숫자를 획기적으로 축소하겠다며 “공공기관과 대기업 등의 상시, 지속적 업무에 대해 비정규직의 채용 자체를 제한하겠다”고 했다. ‘단기간, 단속적’ 업무에만 비정규직을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비정규직 사용을 ‘입구’에서부터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우리사회 임금근로자의 절반 이상인 비정규직이 수행하는 업무 대부분은 ‘상시, 지속적인 업무’다. 유승민 후보의 공약이 점진적이라도 실현되면 비정규직의 숫자는 현저하게 줄어든다. 비정규직을 줄이기 위해 유승민 후보는 ‘입구’를 제한한 반면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는 ‘비정규직 남용방지’를 공약으로 제시했다. 유승민 후보가 몸담았던 과거 새누리당 박근혜 전 대통령의 공약도 ‘비정규지 남용방지’였다. 정부와 재계는 지금도 여전히 고용시장이 경직됐다는 이유로 비정규직을 늘리자고 주장하고 있다.

유승민 후보는 재벌개혁을 단행하겠다는 명시적인 발언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승민의 산업정책 공약은 ‘재벌개혁’이란 표현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재벌개혁 공약과 상당히 유사하다. 재벌총수 일가의 계열사 일감을 몰아 받기 위한 개인회사 설립을 금지하고, 공정거래 관련 법률 전반에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한다. 산업정책의 중심을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중소기업으로 전환한다. 갑을관계의 횡포를 근절시키기 위한 특별법도 제정한다.

유승민 후보의 공약 속에는 과포화 상태인 자영업자의 활로를 열어주기 위해 고민한 흔적도 엿보인다.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탈을 사전에 제한하기 위해 사업조정제도 운영방식을 바꿨다. 또 대기업이 사업조정권고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벌칙도 강화했다. 자영업자의 4대 사회보험 가입을 지원하는 등 사회안전망 확대를 위한 방안도 제시했다.

다소 길었지만 유승민의 공약을 나열한 이유는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지금까지 몰랐던 부분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기 위함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아류의 적폐세력에서 떨어져 나온, 그저 그런 정치인인 줄 알았던 유승민 후보를 새로 발견한 것은 이번 탄핵대선의 또 다른 선물일 수 있다. 어쩌면 해방 이후 이 땅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보수주의자’라는 생각까지 해 본다. ‘기울어진 운동장’, 유승민 후보는 ‘시장의 실패’를 인정했고,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을 국가권력이 가질 수 있다고 동의했다. 국가의 역할을 재벌대기업·부자들의 대문이나 지켜주는 것으로 제한하는 자유한국당과는 분명 다르다.

이번 탄핵대선에서 ‘보수주의자’ 유승민 후보는 안팎에서 싸워야 하는 어려운 처지다. 당 내에선 시장만이 최고 선(善)임을 주장하는 이들로부터 사퇴압력을 받고 있다. 밖으로는 당내 사퇴압력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유의미한 지지율도 얻지 못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전진을 위해 유승민 후보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지워주고 싶은 욕심은 없다. 그렇더라도 이번 대선 이후 또 다시 보수니 개혁이니 하면서 정계개편 또는 이합집산이 진행될 터인데, 그 때 유승민 후보가 보수의 한 축을 담당했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말이 통하는 ‘보수’와 같은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진보’가 공존해야 한다. 그래야만 문재인·안철수·심상정 후보가 구상하는 ‘공정한 시장경제’ 체제를 보다 쉽게 완성할 수 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합리적 보수’가 정치권내에 자리잡지 못한다면, 또 다시 시장만능주의자와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 공정한 시장경제를 만들려는 차기 정부의 정책은 재벌대기업의 거센 도전에 직면할 것이란 점은 불 보듯 명확하다. 재벌대기업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고, 국민적 여론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도 정치권에 합리적 보수세력이 필요하다. 유승민 후보가 이번 탄핵대선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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