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화는 우리나라에서 이미 선사시대부터 인물의 모습이 표현되기 시작해, 삼국시대에 이르면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보듯이 그림으로 적극적으로 그려졌다. 고려시대에는 초상화를 비롯한 일반 인물화만이 아니라 불교인물화가 고도의 발전을 이루었고,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로 계승돼 더욱 큰 진전을 이루었다.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동양 최고 수준에 이르게 된 데에는 조상숭배 사상, 대상이 되는 인물에 대한 정확한 사실적 묘사와 내면세계의 진솔한 표출을 지향하는 전신사조(傳神寫照)가 바탕이 됐음을 알 수 있다.

겸재 정선 ‘행단고슬도’ 화첩, 18세기, 비단에 채색 29.6×23.3cm, 왜관수도원

고사(故事)란 예전에 일어난 일 또는 그 일로 인해 전해지는 이야기를 말한다. 예전에 일어난 일이란 단순한 옛 일이 아니라 교훈적 의미나 내용이 담겨 후세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를 가리킨다.

이러한 고사인물화의 범위를 살펴보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인물의 행적을 들 수 있고 생활상이 포함된다. 주로 문학작품이나 고전경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비역사적 인물도 회화의 대상이 된다. 또 고사의 전체 내용이나 한 부분을 시각적인 묘사를 통해 고사에 내포된 인간의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기 때문에 서사적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고사인물도는 중국과 공통된 문화권이란 인식 아래 중국의 고사나 일화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 많이 있다. 한국의 역사나 유명 인물의 일화를 소재로 한 그림이 전혀 없지 않지만 그 수는 많지 않다. 대부분 중국의 역사와 인물의 문인들을 주제로 정해 고유의 복식에 따라 그려져 한국의 고사인물화는 자칫 중국적인 그림이 될 수 있으나, 중국풍으로 치부하기보다 각 화제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오원 장승업과 겸재 정선도 즐겨 그려

장승업 ‘고사세동도’ 견본담채, 141.8x39.8cm, 1843년 호암미술관(왼쪽). 장승업 ‘관아도’ 족자비단에 수묵, 143.5x41cm, 호암미술관(오른쪽)

사모관대를 갖춘 선비가 흐뭇한 표정으로 바위에 기대어 물가에서 노니는 거위를 바라보고 있고, 더벅머리 동자도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조심스레 동행했다. 담묵과 담채가 어우러진 강가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극단적으로 휘고 굽은 바위 주름, 특이한 표정의 인물, 기괴한 바위너설을 어긋매껴 굴절시키면서 점경(點景)으로 처리한 구도법. 이러한 것들이 모두 한데 어울려서 이 작품에 일종의 괴이한 분위기를 빚어내고 있다.

장승업의 다른 고사인물도인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는 예찬일화를 담채와 담묵으로 은은하게 회화화한 것으로 왼편 아래쪽의 괴석 옆에 앉아 초연한 예찬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이것과 서로 마주하고 있는 준열한 선으로 구성된 오동나무의 줄기와 흰 수건을 든 시동은 화면에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또한, 오동나무의 줄기는 뻗어 올라간 위쪽의 중심에서 왼쪽으로 화면을 채워 화면을 안정시키고 있다. 꼼꼼한 필치로 묘사된 인물상과 오동나무, 이에 선염된 군청, 녹청의 담채는 예찬의 깔끔한 성품을 암시한다.

진경산수로 유명한 겸재 정선 역시 고사인물도를 즐겨 그렸다. 그는 화가로 유명하지만, 당대 유학자이기도 했다. 그만큼 옛 선인들의 고사에 해박했으며 관심이 높았다.

겸재가 그린 역사적 인물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 중에 공자가 제자들과 경전을 읽고 음악을 즐긴다는 내용인 ‘행단고슬도(杏壇鼓瑟圖)’를 보면, 신록이 우거진 한적한 동산에 담청색과 담홍색의 심의(신분이 높은 선비들이 입었던 웃옷)를 정갈하게 갖춰 입은 문인들이 모였다. 하얀 수염을 드리운 노선비는 동파건(중국의 문인 소동파가 썼다고 전해지는 모자)을 쓰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서로 마주보고 웃으며 담소를 나누거나 아름다운 금의 운율을 즐긴다. 아름드리 나무 아래, 그리고 돌로 만든 석단 위에 모여서 학문의 진리와 자연속의 풍류를 공유하는 스승과 제자들을 그려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 우리는 어떤 인물의 일화를 그림으로 그려 소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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