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발의 커트머리, 미소년 같은 얼굴의 소유자 리 밀러(Elizabeth Lee Miller, 1907~1977). 뉴욕주 포킵시에서 태어난 밀러는 한 때 패션 잡지 보그의 대표적인 모델로 활동했고, 초현실주의 사진작가로서 한 시대를 장식했다.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모델로서 매력을 마음껏 뽐내며 만인의 뮤즈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사진을 찍히는 피사체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사진작가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당대 최고의 비주얼 아티스트였던 맨 레이의 스튜디오.

맨 레이(Man Ray, 1890~1976)는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겸 조각가, 화가로서 다양한 예술적 재능을 보여줬다. 그는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재단사였던 러시아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의 사회적 흐름에 동참하며 성을 레이(RAY)로 바꾸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패브릭 조각들을 이은 옷들을 직접 디자인하는 것을 즐겼다. 레이는 가족들과의 사사로운 연을 끊길 원했지만 그의 작업에는 오히려 바늘, 핀, 실, 천과 같은 오브제들이 표현돼 있다. 그러나 정작 레이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것은 패션모델이나 피카소, 마티스, 헤밍웨이 같은 유명 인물을 촬영한 사진들이었다.

무작정 레이의 스튜디오 근처를 서성거리던 밀러는 우연히 그를 만나자 다짜고짜 제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당혹한 레이는 거절했지만 밀러의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밀러는 결국 레이의 연인이었던 키키마저 떠나보내고, 3년여라는 시간 동안 레이의 연인으로 동거를 하며 사진작가로서의 예술적 기반을 다진다.

롤랜드 펜로즈가 그린 밀러의 초상화 Night and Day, 1937<출처=pinterest.com>

그러나 또 다시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밀러의 깊은 곳에서는 그동안 묻어두었던 예술적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밀러의 앞엔 운명처럼 초현실주의 화가 롤랜드 펜로즈(Roland A Penrose, 1900~1984)가 기다리고 있었다. 밀러와 펜로즈는 이미 맨 레이의 소개로 일면식이 있던 사이.

그녀는 펜로즈로부터 예술적 영감을 받아 제2차 세계대전의 종군기자로 자원을 한다. 밀러는 전쟁 기간 내내 카메라를 들고 피투성이로 나뒹구는 병사들, 나치 수용소의 시체들 같은 사진을 찍어 보그 잡지에 게재했다.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포착해낸 사진들은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밀러는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7년 이집트의 거부와 공식적으로 이혼을 하고 펜로즈와 두 번째 결혼을 한다. 둘은 영국 런던 외곽의 농장에서 생활을 하며 같은 해에 아들 토니를 얻는다. 밀러에게도 평온한 삶이 이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식을 돌보는 일보다는 예술 작업에 몰두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 선택은 남편과 아들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만다. 이로 인해 자살까지 고민하던 밀러는 오히려 타인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보다는 자신의 삶에 더 충실해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그 때 찾은 것이 요리였다. 요리를 통해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게 되었고 가족과의 평화로운 관계도 되찾을 수 있었다.

브레이크 없는 욕망의 열차라도 탄 것처럼 거침없이 질주하며 누군가에겐 예술적 영감을 줬고 또 누군가에겐 회한을 안겨주기도 했던 그녀는 1977년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뮤즈로서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2003년 LA 게티센터에서는 서로가 예술의 뮤즈였던 리 밀러, 맨 레이, 롤랜드 펜로즈의 사진과 회화 작품들을 한 자리에 선보이며 20세기 초반 초현실주의 예술의 흐름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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