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여명의 근로자들이 기아차를 상대로 제기한 통상임금 소송에서, 3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재판장 권혁중)가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칙’ 법리에 따라 근로자의 청구를 기각했던 최근 고등법원 판결의 주류 입장과 궤를 달리 판단한 것이다. 

원금 3126억원, 이자 1097억원…총 4223억원 지급하라 

기아차 근로자 2만7424명(사망자 포함)은 연 759%의 정기상여금을 비롯한 각종 수당을 통상임금에 포함해서 수당·퇴직금 등을 재산정 지급해 달라며, 2011년 10월 체불임금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청구금액은 임금 6588억원에 이자 4338억원을 더해 1조926억원에 이른다. 근로자들의 체불임금 청구에 대해 중앙지법은 근로자들에게 원금 3126억원, 이자 1097억원 등 총 4223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이 통상임금 소송 1심에서 일부 승소한 3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김성락 전국금속노동조합 기아자동차지부 지부장이 입장을 밝히고 있다.<사진=뉴시스>

중앙지법의 원고 일부 승소판결에 대해 경영계는 일제히 보도자료, 논평 등을 통해 ‘신의성실 원칙’을 법원에서 인정하지 않았다며 유감을 표했다. 

‘신의칙’은 ‘법률관계 당사자는 상대방의 이익을 배려해 형평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내용 또는 방법으로 권리를 행사하거나 의무를 이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측은 지금까지 상여금은 통상임금이 아니라고 노사 모두 인식해왔기에, 이번 판결에서도 신의칙을 인정해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는 것이 신의칙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받아야 할 임금을 이제 지급하면서 중대위협은 부적절”

하지만 경영계의 신의칙 주장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은 “근로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임금을 이제 지급하면서 중대위협이라고 보는 건 적절치 않다”며 “사측의 신의칙 위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일축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판결 직후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통상임금 판결은 대법원이 제시한 신의칙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상급심에서는 보다 심도있게 고려해 판단해 주기를 기대한다”며 “통상임금 소송은 노사 당사자가 합의해온 임금관행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노사간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이다. 향후 노사간 소모적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는 통상임금의 개념과 범위를 명확하게 정하는 입법조치를 조속히 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경영계, 통상임금의 개념과 범위를 명확하게 정해 입법을 

한국경영자총협회와 전국경제인연합도 이번 판결이 가져올 경영계의 ‘부담과 손해’, ‘과도한 인건비 추가 부담’ 등을 우려하며 비판대열에 가세했다. 

경총은 이날 논평을 통해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면서 신의칙을 적용하지 않은 점은 기존 노사간 약속을 뒤집은 노조의 주장은 받아들이고, 지난 수십년 간 이어온 노사합의를 신뢰하고 준수한 기업에는 일방적으로 부담과 손해를 감수하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경련 또한 ”과도한 인건비 추가부담 등 기업경영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각계각층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 통상임금 정의 규정을 입법화하고, 신의칙 세부지침을 조속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전국금속노동조합 법률원 김두현 변호사는 “통상임금은 근로기준법에 따른 것이고, 그에 따라 반드시 지급해야 하는 것이다”며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2012다89399판결, 2012다94643 판결)은 소정근로의 대가이고 정기적·고정적·일률적으로 지급되는 각종 수당과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으로 인정했기에, 이번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에서도 이를 인정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지법이 근로자의 청구 일부를 인용한 직후, 기아차가 항소방침을 밝힘에 따라 항소심 결과가 더욱 주목된다.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에 앞서 아시아나항공 사건 판결(서울고법 2014나32153)과 현대중공업 사건 판결(부산고법 2015나1888), 금호타이어 사건 판결(광주고법 2016나10826)의 경우, 모두 1심에서는 사용자의 신의칙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항소심에서는 3건 모두 신의칙을 이유로 근로자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3건의 소송에서 재판부는 회사의 ‘비용부담’ 또는 ‘당기순손실에 따른 재무위기’를 근거로 상여금을 통상임금 포함하는 것은 신의칙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기아차, 도산위험 사유 없기 때문에 신의칙 인정받지 못했다”

김 변호사는 “신의칙 원칙은 민법에 규정된 것으로 임금 이외 대금체불에 대한 청구와 같이 극단적인 경우에 적용돼야 한다”며 “다만 2013년 대법원 판결은 회사의 어려움이 어느정도 수준을 말하는 것인지 모호했고, 이에 따라 일선 판사들마다 회사의 어려움에 대한 기준이 달라 예측이 어렵다. 하지만 기아차의 경우 도산위험과 같은 사유가 없기 때문에 1심에서 신의칙 원칙을 인정받지 못했고, 2심에서도 이를 유지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종업원 450명이상 중견·대기업중 현재 35곳, 99건의 통상임금 소송이 진행중이다. 이중 ‘소급지급 관련 신의칙 인정 여부’를 다투는 소송이 전체의 65.7%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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