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궁금했다. 대통령 직속의 국가 최고정보기관 ‘국가정보원’이 있는데, 북한에 대한 주요 정보를 왜, 해외정보에 의존하는 것인지. 알고보니 국정원이 국민을 ‘주적’으로 삼고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명박정부에서 국정원이 문화·예술·연예계 인사 82명을 좌파로 분류해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이들을 퇴출시키기 위한 공작을 벌인 사실이 드러났다. 또 ‘박원순 서울시장 제압 문건’을 작성해 보수단체 시위를 조장하고, 온라인에 박 시장에 대한 비난 글을 유포하거나 불신임을 요구하는 청원활동을 주도한 것도 국정원임이 밝혀졌다.

국가정보력을 이용해 정부 비판 성향의 인사들을 탄압했다는 사실도 경악스럽지만, 그 방법의 치졸함은 이 나라 국민임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블랙리스트 명단에 포함된 배우 문성근씨와 김여진씨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 위해 국정원은 이들의 알몸 합성사진을 조작해 인터넷에 유포했다. ‘공화국 인민배우 문성근, 김여진 주연, 육체관계’라는 소개 글도 덧붙였다. 그리고 사회적 이슈마다 등장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정부 옹호 시위를 벌였던 어버이연합, 엄마부대 등 극우단체들의 배후에도 국정원이 있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정보 엘리트가 모인 국정원의 수준이었다니!

배우 문성근씨는 JTBC 뉴스룸과의 인터뷰에서 “수준이 너무 저급해 극우사이트 일베 안에서 쓰레기들이 만들 거라 생각했다”며 “국정원에서 했을 거라 생각도 못했다”고 탄식했다. 김여진씨는 자신의 트위터에 “그게 그냥 어떤 천박한 이들이 킬킬대며 만든 것이 아니라 국가기관의 작품이라고요”라며 “그 추함의 끝이 어딘지 똑바로 눈뜨고 보고 있기가 힘들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19일 더불어민주당 적폐청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1000만 국민이 선출한 서울시장에게 이랬다면 일반 시민들에겐 오죽했겠나”라며 거대권력의 횡포를 비판했다. 박 시장은 이날 ‘이명박 정부 당시 국가정보원이 박원순 제압 문건을 작성했다’는 등의 이유로 이 전 대통령을 서울중앙지검에 고소·고발했다. 문성근, 김미화 씨를 비롯한 문화·연예계 블랙리스트 피해자들도 이 전 대통령을 상대로 줄소송을 예고했다.

이외수·조정래·진중권·문성근·김여진·김민선·이창동·박찬욱·봉준호·김미화·김제동·윤도현·故 신해철 등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82명의 문화·예술·연예계 인사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단지 정부에 비판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이명박 정부는 이들을 생업에서 몰아냈다. 국정원이 ‘적폐청산 TF’를 꾸려 개혁하려는 의지를 보이곤 있지만, 이제 어느 누구도 국정원이 생산한 정보를 있는 그대로 믿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보수집권과 수사권을 통해 국정원이 막강한 권력을 계속 누리고자 한다면, 또 언젠가 권력자에 의해 휘둘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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