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진국 미술평론가, 종합인문주의 정치비평지 ‘말과활’ 편집위원

영원히 사랑받을 회화

현대미술은 무척 난해하다. 충격적이지만 한편으론 신선하다. 이러한 현대미술이 주도하는 지금의 미술계에서 전통적인 회화는 퇴물 취급을 받고 있다. 테크놀로지와 결합하여 현란한 모습을 보이는 미술이나 심오한 사유를 담은 미술 앞에서 전통회화는 무척 초라해 보일 때가 많다.

하지만 미술을 머릿속으로 그릴 때, 대부분 캔버스와 그것을 마주하고 있는 화가를 클리셰(cliché)처럼 떠올린다. 미술을 이야기할 때, 여전히 전통회화를 빼고 말할 수 없다. ‘회화는 죽었다’라고 선언한 시대에도 회화는 미술의 중심에서 변함없이 그려지고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다.

1989년 즈음의 영국은 ‘프리즈(Freeze)’(1988) 전시의 큰 성공으로 yBa(young British artist, 영국 청년 작가)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충격적인 설치작품이 대세로 떠오르고 있었다. 데미안 허스트나 트레이시 에민 등의 작가들이 미술계의 총아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그 당시 전통회화는 한물갔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하지만 그때도 여전히 전통회화는 그려지고 있었고, 새로운 가능성은 곳곳에서 숨 쉬고 있었다.

yBa가 부상하던 그 시기에 그들이 활동하던 런던에서 그들의 동년배 작가 중 유화로 서정적인 풍경화를 그리는 이가 있었다. 바로 피터 도이그(Peter Doig, 1959~). 현대미술에서 진부하다고 취급하던 시기, 특히 yBa가 급부상할 시기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고 전통 유화 작품을 꾸준히 그려나갔다.

피터 도이그, ‘블로터(Blotter)’, 1993, 캔버스에 유채, 249x199cm, 1993년 ‘존 무어 회화상’(John Moores Painting Prize) 수상 작품.<출처=www.artsy.net>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그 관심과 사랑은 미술 경매에서 더욱 뜨거웠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열렬한 지지를 받았는데, 특히 2007년에는 소더비 경매에서 그의 작품인 ‘하얀 카누(White Canoe)’(1990-1991)가 추정가 120만파운드를 훌쩍 넘어 당시 생존한 유럽 작가 중 최고가인 573만2000파운드(약 105억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도이그의 전통 유화 작품에 무엇이 있기에 충격적인 설치작품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에도 이렇게 큰 관심과 사랑을 받았을까?

조용히 감상하고 싶은 그림

도이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데 집중하느라 놓쳐버리는 것들에 관심이 있습니다. 사진을 찍고 나서 실망하게 되는 건, 찍을 때 당신이 느꼈던 감정을 사진이 고스란히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죠.”

사진은 사실을 담을 수 있지만 감정까지 담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도이그의 회화는 사실 너머에 존재하는 감정이 스며있다. 그는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얄팍한 시각적 사실성(사진), 그 내면에 잠재된 감정을 회화의 표면 위로 끌어 올린다.

그의 회화 작품은 기본적으로 그 환경이 실존임을 알려주는 사진 이미지(사진, 관광 광고지, 음악 앨범 커버 등)를 토대로 그린다. 먼저 현실성에 좌표를 찍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좌표를 찍은, 원래의 이미지가 가진 시각적 현실성은 그의 손끝을 타고 화면에 표현되는, 마음을 흔드는 얇고 투명한 색채와 단순한 표현으로 환상적이고 감정적인 현실로 변화된다. 실재적 현실은 어느새 현실 너머의 현실로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평가들이 그의 회화를 ‘반만 기억된 꿈’(halfremembered dreams)이라고 논평하거나, ‘신비주의적 사실주의’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줄도 모르겠다.

피터 도이그, ‘하얀 카누(White Canoe)’, 1990~1991, 캔버스에 유채, 241x200cm, 2007년 소더비 경매에서 당시 생존한 유럽 작가 중 최고가인 573만2000파운드(약 105억원)에 낙찰.<출처=www.artimage.org.uk>

이러한 표현방식은 그의 작업방식과도 연관되어 있다. 도이그는 의식적으로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공간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다. 런던에서는 캐나다를, 캐나다에서는 런던을 그린다. 자신의 아틀리에가 있는 카리브해의 트리니다드에서는 다른 장소의 사진이나 관광지 광고에서 영감을 얻는다. 이러한 그의 의식적 행동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낭만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 또 다른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그는 오랜 시간 작업실에 머물면서 자신의 작품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작품 앞에서 계속 고민한다. 그가 하는 고민은 ‘어떻게 하면 그림을 더욱 단순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이다. 그는 그림에 무언가를 더 넣고자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덜어내기 위해 고민한다.

그 고민의 시간은 그의 작품이 시각적으로는 단순하면서도 얇지만, 감정적으로는 깊은 울림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가 오랜 시간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며 그려나갔던 고민의 시간만큼 감상자도 조용히 오랜시간 그 작품을 감상하고 싶은 바람을 갖게 만드는 줄도 모르겠다.

도이그의 작품은 어울리지 않는 색채의 조합과 예상하지 못한 구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부자연스럽지 않다. 이런 자연스러움은 도이그가 오랜 시간 바라보며 고민한 결과는 아닐까.

그의 작품은 여전히 전통회화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감상자에게 신비로움을, 때로는 섬뜩함을 안겨준다. 조용히 오랜 시간 보고 싶게 만든다. 우리는 충격적이거나 혁신적인 것에 반응한다. 하지만 그것에서 편안함을 느끼지는 못한다. 어쩌면 우리의 본성은 일상적인 삶과 그 삶이 지니고 있는 신비로움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구조화되어 있는 줄도 모른다.

우리가 도이그의 작품에서 오래 머물며 감상하고 싶어지는 것은 그 작품이 신비로운 편안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바로 일상적인 삶과 그 삶이 지니고 있는 신비로운 편안함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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