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했지만, 충격은 컸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현지시간 21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권고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얘기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미국으로 수출하는 250만대 세탁기 가운데 120만대를 상회하는 물량에 3년간 40~50%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이다. 지금껏 1%대 관세로 세탁기 팔아서 영업이익률 5%를 낸다는 삼성·LG에 40~50% 관세를 부담하란다. 삼성·LG가 보인 당혹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선지 세이프가드 직격탄을 맞은 삼성·LG는 물론 정부도 우왕좌왕하기는 마찬가지다. 세이프가드 발표 이후 하루 만에 대책마련을 못한 삼성·LG 그리고 정부의 무능을 탓하고자 함이 아니다. 애초부터 잘못된 길을 너무 멀리 와버려서, 원점부터 다시 시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처지가 안타까워서다.

정부는 22일 오후 강성천 통상차관보 주재로 외교부 수입규제대책반, 삼성·LG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대책회의를 가졌다. ITC 권고안이 미치는 수출차질 영향 등을 분석하고, 업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권고안이 채택되도록 노력한다는 방침이다. ‘노력’을 대책이라고 내놨지만, ‘돈독’에 눈이 먼 미국정부에 구걸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세이프가드가 실행되면,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위반 여부 등을 분석해 WTO에 제소한다고 했다. WTO 제소, 하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만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지난 2013년 8월 ITC가 삼성·LG에 각각 부과한 9.29%·13.2% 반덤핑 상계관세를 미국정부는 지금도 부과한다. ITC 반덤핑판정에 대해 지난해 3월 WTO 분쟁해결기구(DSB)가 협정위반이라고 판정했고, 미국 상소로 개시된 2차 심리 역시 같은 판단을 했음에도 그렇다.

WTO 결정마저 무시하는 미국정부를 상대로 WTO에 다시 제소한다. 내년 1월로 예상되는 세이프가드 발효를 가정하면, 전례에 비춰 WTO DSB 판정이 나오는데 4년이 걸린다. 승소판정을 받았다고 해도 지금과 같이 미국정부가 이행하지 않으면, 그 다음 대처방안에 대해 정부 역시 얘기한 바 없다. 설령 대응방안이 있더라도, 삼성·LG가 그때까지 세탁기를 생산하고 수출하고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번 세이프가드는 저율관세할당(TRQ) 120만대를 초과한 세탁기에 고율관세를 부과하는데서 머물지 않는다. 트럼프 선택에 따라선 120만대에도 20% 관세가 부과될 수 있다. 완제품인 세탁기 이외 부품 역시 TRQ를 5만개로 정하고, 이를 넘어서는 물량에 첫해 50% 관세를 부과한다.

250만대를 수출하는 삼성·LG에 완제품 수출물량의 절반은 최대 20%, 나머지 절반은 40~50% 관세를 부과하라는 조치는, 더 이상 미국에 세탁기를 수출하지 말라는 의미다. 세탁기를 미국시장에 팔고 싶으면 삼성·LG가 미국에 공장을 짓고, 미국 근로자를 고용하고, 미국에서 생산하란 트럼프 메시지다. 그래선지 대다수 언론은 삼성·LG 관계자 말을 인용, 삼성·LG가 미국에 이미 짓고 있는 공장준공을 앞당겨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대책’을 전했다.

한가한 소리다. 목전에 둔 태풍에 대비해 우산을 고친다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삼성·LG가 소유한 미국공장에서 세탁기를 조립하기 위해선 부품을 수입해야 한다. 세이프가드는 부품 TRQ를 5만대로 묶었다. 200만대 세탁기를 생산하기 위해선 TRQ 5만대 이외 195만개 부품에 대해 50% 관세를 부담하고 수입해야 한다. 이러나 저러나 삼성·LG 세탁기는 미국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

한미간 통상질서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미국시장에 세탁기를 팔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삼성·LG가 미국 땅에 완제품과 부품공장 모두를 갖고 있어야 한다. 세이프가드만을 해결하려는 대책, 미국의 이해만이 관철되는 통상질서를 깨자는 의지와 실천이 없다면, 미국에 세탁기를 수출할 수 있는 현실적인 해결책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가능하지도 않지만 완제품과 부품공장을 미국에 세워 세탁기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이미 세이프가드 구제조치 판정과 함께 최대 35% 관세를 부과받은 태양광모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또 올해 미국 상무부가 반덤핑·상계관세를 부과하기 위해 절차를 밟고 있는 품목만 ▲가소제 ▲합성고무 ▲유정용 강관 ▲철강선재 ▲폴리에스테르 단섬유 ▲한국산 냉간압연강관 ▲페트(PET) 등 모두 7개에 이른다. 한국경제의 버팀목이나 다름없는 반도체와 자동차 역시 무풍지대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이런 이유로 현재 정부와 삼성·LG가 진행중인 세이프가드를 전제한 대응책 마련은 헛된 노력에 그칠 개연성이 다분하다. 

한국경제가 세이프가드 태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 주도 통상질서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 그렇다고 미국과의 통상협정을 당장, 전면 파기하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라도 한미관계를 ‘혈맹’, ‘동맹’, ‘우방’ 등 미사여구로 포장하는 바보짓을 하지 말자는 얘기다. 경제면 경제, 군사면 군사, 정치엔 정치로 각각 구분해서 상호 호혜를 전제로 실용적인 접근을 시도해보자고 제안한다. 

혈맹국이란 이유로 수십억달러를 들여 미국무기만 들여오지 말고, 유럽무기보다 군사적 관점에서 유용하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 사자. 한미FTA 재협상을 앞둔 지금, 정부가 미국의 억지주장만을 대변하지 말고, 한미FTA 발효 5년에 대해 계산기를 두드린 후에 협상을 하자. 남북문제를 포함 한반도 운명을 우리정부가 결정하는 것임에도, ‘자주’ 또는 ‘균형’이라고 쓰면 ‘반미’라고 해석하는 미국정부의 오만함에 ‘NO’라고 단호하게 대응하자.

혹자는 물을 수 있다. 미국 중심의 통상질서에서 벗어나면 수줄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가 굴러갈 수 있냐고. 답한다. 당장 분명한 해결책은 제시할 수 없지만, 대안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은 아직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미국 일방통행의 통상질서를 계속 용인한다면, 한국경제의 미국 의존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화될 뿐이다. 또 그만큼 커져가고, 반복될 것이 분명한 대미 리스크를 향후에 한국경제가 감내할 수 있을지는 정말 의문이다. 이미 많이 왔지만 돌아갈 기회가 있을 때, 처음부처 다시 시작하겠다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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