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는 한국에서 서양미술의 등장 이전, 가장 흔하게 쓰이는 그림의 재료였다. 창문에 발라 창호지로 쓰거나, 연날리기의 도구로서도 일상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재료였다.

이렇게 다양하게 쓰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성형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가죽과는 달리 나무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오늘날 한지의 기억을 삶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이들은 극히 드물어졌다.

그러한 추억의 매개체이자 우리의 전통을 찾기 위한 민족주의적 운동의 일환으로 1980년대 한지를 재료로 활용하는 미술작가들이 증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한지의 활용을 주도한 미술가로 권영우가 있다.

◇동양화단의 샛별=함경남도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유년기를 보내다 해방 후 서울에 온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입학했다. 당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설립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장발은, 서양화와 동양화를 제1회화, 제2회화과로 나눠 불렀다고 한다. 미술의 장르를 가릴 것 없이 도구의 속성만으로 학과를 구분 지은 것이다.

이러한 학풍은 권영우의 미술이 기존 동양화를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행보를 지향하는데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는 부산학사에서 졸업 후 종군 화가단으로 활동했고, 이후 휘문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공부를 계속해 석사학위를 수여받았다.

‘무제’, 패널에 한지, 130.5×162cm, 2002, 국립현대미술관.

권영우는 초기에 국전을 중심으로 새로운 작품을 발표했는데, 초현실주의적인 것들을 작품의 소재로 활용한 그림들을 선보였고, 전후 새로움을 모색하던 화단의 요구와 마주해 여러 번 수상할 수 있었다. 권영우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미술을 선보이려 다양한 노력을 시도했고,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화단의 추상화 운동과 동양화단의 추상 미술가들 모임인 묵림회의 영향을 받아 수묵 추상작품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한지와 미술의 만남=1958년, 동양화가인 이응노는 미술계 초미의 관심사를 받으며 프랑스로 이주했다. 이응노는 이주 후 한국에 지속적으로 글을 발표해, 프랑스와 독일의 미술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용구의 혁명’을 시도하며 유럽 화단의 성향을 파악한 이응노의 선택은 종이를 구기고 자르고 붙이는 격정적인 표현방법의 콜라주 작업이었다.

1962년 권영우는 이응노의 영향을 받아 종이를 주요 소재로 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응노의 길을 답습하기보다 네모지게 오려 붙인 한지들을 다른 종이에 부착해 정적인 추상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그의 시도는 당시 점차 사라져가는 창호지문에 대한 노스텔지어로 읽히며 많은 호평을 받았다. 한지에 대한 시대와 문화적인 해석은 1970년대에 흰색에 대한 민족적인 요소로 해석됐다. 1970년대에 한국은 새마을운동을 비롯해 국가가 주도한 민족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한국적인 것에 대한 모색을 지속했으며, 흰색과 한지는 이러한 주체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미학적 도구 중 하나로 활용됐다.

이러한 움직임은 오늘날 한국의 ‘단색화’에 대한 미술사조를 있게 한 일본 동경화랑에서 진행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 전시로 묶이기도 했다. 권영우는 자신의 그림에 등장하는 흰색을 안료의 흰색과 차별화를 두며 기름기라고는 없는 소담한 맛, 동양의 것이라기보다 순수한 정서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권영우의 미술 행보는 한지에 대한 가능성의 확장과 더불어 동양화계에 새로운 혁명과 같았다. (중기이코노미 객원=김태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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