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이 있은 후’, 종이에 수묵, 146×183cm, 1957, 국립현대미술관.

한지의 활용을 주도한 미술가 권영우는 1978년 중앙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프랑스로 향해, 자신의 미술세계를 확장시키기 위한 모색을 시도했다. 파리에서 권영우는 보다 적극적인 시도를 감행했다.

◇무한한 확장의 탐구=그림에 색을 등장시켰고, 종이를 찢어 화면을 구성하기도 했다. 배경지에 물감을 바르고 이후 앞에 종이를 덧대어 스며 나오는 물감의 형상은, 마치 자연의 섭리를 연상시키는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또한 흰 화면의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긁기나 찢기 등의 행위는 겹겹이 덧대어 만들어지는 종이인 한지의 특성과 어우러져 연출된 독특한 파열의 느낌이 든다. 찢어진 종이 틈새의 공간과 그 그림자들이 텁텁한 한지 위에서 연출하는 고아한 느낌은 프랑스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권영우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한지를 소재로 한 작품을 선보이는데, 물건을 부착하고 그 형상을 떠내는 부조의 형식을 가지고 오는 등 여러 변용을 모색했다.

‘무제’, 종이에 수묵, 과슈, 224×170cm, 1985, 국립현대미술관.

전통적인 지필묵의 표현형식을 넘어 한지 그 자체를 조형 언어로 활용한 것이다. 그의 화면에는 사유할 수 있는 여백의 미가 있었고, 붓 없이도 선의 강약의 차이에 따른 긴장감이 존재했다.

화면의 긴장감은 미술가 자신이 한국사의 한복판에서 이주와 전쟁을 경험했기에 그 파열의 의미가 남다르게 감상되기도 한다. 또한 물건의 형상 위에 한지로 뒤덮어 만든 형상은 형태만이 남아 마치 현란한 사물의 본질적인 의미조차 잊게 만드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작품 전개방식은 작가조차 완벽하게 예측이 불가능하기도 하다.

오늘날 한지는 일상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소재가 됐다. 그러나 그 시대를 상징할 수 있는 보편적인 미학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권영우가 선택한 한지라는 지역 특수적인 소재에서 발현된 특이하지만 보편적인 다양한 아름다움은 당대는 물론이거니와 시대를 초월해 오늘날 단색화라는 이름으로 재소환 될 수 있었다.

다양하고 현란한 소재로 뒤덮인 현대미술의 장에서 권영우의 미술이 지속적으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도전 정신과 치열한 조형적 연구에 기인하고 있다. 또한 그의 미술이 한국을 나아가 세계의 무대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김태현 미술평론가)

<저작권자 ⓒ 중기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관련기사 ㅣ 추억의 매개체 ‘한지’…순수한 정서를 보여주다
• 관련기사 ㅣ 블랙리스트 ‘이응노 미술관’ 어처구니 없는 일
• 관련기사 ㅣ 추상화적 글자에 주목해 동양 정신을 표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