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승용 박사(중국 문학, 한국외대 중국연구소 연구원)

세종실록(世宗實錄) 25년(1443년) 12월30일 조목에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컬었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是謂訓民正音)”라고 했다. 여기에서 한글이 창제됐다고 한 12월30일이 양력으로는 다음 해 1월15일인데, 북한에서는 이날을 ‘조선글날’이라 정해 기념한다.

이어서 세종실록 28년(1446년) 9월29일 조목에 “이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是月, 訓民正音成)”라고 했고, 훈민정음의 해설서인 정인지(鄭麟趾)의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 서문에는 ‘1446년 9월 상순(正統十一年九月上澣)’에 한글을 반포했다고 했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해 1926년 지금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와 신민사가 세종이 언문 28자를 만들었다고 한 1443년이 아니라 반포한 해인 1446년 음력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10일을 양력으로 다시 계산해 10월9일을 한글날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글이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고 알려졌었지만, 세종실록에 “임금이 친히 지었다(上親制)”라고 했고, 해례본의 서문에는 세종이 “내가… 새로 28자(字)를 만들었다(予… 新制二十八字)”라고 했다. 애초에 한글의 명칭이 백성들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에서 훈민정음이라고 일컬은 것에서도 보듯이, 세종은 왕으로서 백성들을 일깨우기 위해서 한글을 직접 창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연했던 오페라 ‘세종 1446’의 포스터다. 마치 1446년에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것처럼 알려졌지만, 실제로 한글 창제는 1443년이며, 1446년은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 검증을 마치고 반포한 해다. <사진제공=문승용 박사>

해례본 서문에서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에 대해 밝히기를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에게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 便於日用耳)”라고 한 것에서 세종의 한글 창제 의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종은 문자를 만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하면 반대가 심할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왕자나 공주 등의 도움을 받아서 한글을 창제했는데, 세종이 집현전의 학자들과 공동으로 한글을 창제했다고 알려진 것은 1443년에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다음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해 한글을 검증하고 해설하는 작업을 맡겼고, 3년 뒤인 1446년에 한글을 반포한 것을 두고 한글이 창제된 것으로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이다.

당시 세종의 명을 받은 집현전의 학자는 정인지(1396~1478), 신숙주(1417~1475), 성삼문(1418~1456), 최항(1409~1474), 박팽년(1417~1456), 강희안(1417~1464), 이개( 1417~1456), 이선로(?~1453) 등이다. 이들 가운데 해례본 서문을 쓴 정인지가 50세였던 것을 제외하고 대체로 서른 살 전후의 젊은 나이로서 1409년생인 최항이 37살이고, 1417년생으로 신숙주, 박팽년, 이개 나이가 29살이고, 1418년생인 성삼문이 28살이었다. 이것 역시 집현전 중신들의 반대를 예상해 궁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젊은 학자들에게 한글 검증작업을 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집현전의 부제학(副提學) 최만리(?~1445)는 세종이 집현전의 원로 대신들조차 모르게 문자를 창제한 점이나, 집현전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자신과는 상의도 없이 젊은 학자들을 불러서 한글 검증작업을 시킨 것에 대한 불만을 나타냈다. 이와함께 우리 문자를 만드는 것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고 중국문화를 사모하는 데 부끄러운 일이라고 전제하고, 당시 이두(吏讀)로도 불편하지 않게 사용하고 있는데 익히기 쉬운 언문을 사용하게 되면 애써서 관리가 되려고 하는 이들이 성리학을 공부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라 했다. 또 형벌과 옥사를 공평하게 하는 것 역시 문자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서 이처럼 중차대한 일을 성급히 추진해서는 안 된다고 해 극렬하게 반대했다.

중국 청도(靑島) 노신공원에 있는 노신의 석상이다. 노신은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에 침탈당하는 중국의 현실을 통탄하며, 중국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가 한자와 같이 어려운 문자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한자를 폐지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했다. <사진제공=문승용 박사>

중국의 사정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은 종이, 인쇄술, 나침반, 화약 등 유럽을 근대 산업화사회로 이끌었던 주요 발명품을 일찍부터 보유하고 있었으면서 선비를 우대하는 관료주의 신분질서 속에서 어려운 한자를 사용함으로써 정보와 지식이 당시 지배계층의 전유물처럼 되어 버려 사회발전을 막아 버렸다.

아편전쟁 이래 서구 열강들의 침탈에 시달리게 된 중국의 현실을 통탄했던 노신(魯迅)이 “한자가 없어지지 않으면 중국은 반드시 멸망한다(漢字不滅, 中國必亡)”라고 했다. 이는 익히기 어려운 한자가 기득권력층의 지배권을 유지하는 데에 유리하다는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당시 낮은 신분이라서 문자를 익힐 기회가 없었던 기술자들이 그나마 알고 있었던 과학지식을 손쉽게 글로 적어서 세상에 전달해 보다 많은 기술자들이 공유하고 나라를 발전시킬 기회까지도 막았다고 본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누가 누구를 지배하거나 군림하는 계급사회가 아니지만, 기득권자들의 이기주의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이미 권력을 잡은 정치인은 좀 더 권력을 이어가려 하고, 이미 많은 돈을 가진 부자는 좀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서 애쓰려고 한다. 이외에도 이른바 ‘~사’라고 하는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이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이용해서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려만 한다면, 그런 사회가 진정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는지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한국외대 중국연구소 문승용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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