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진국 미술비평가(‘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부모의 성을 모두 사용하는 스페인 전통에 따라 공식적으로 그를 아버지의 성 ‘루이스’와 어머니의 성 ‘피카소’를 붙여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Pablo Ruiz Picasso)로 불러야 하지만, 보통 짧게 쓸 때는 아버지 성만 부르게 된다. 그래서 그를 ‘파블로 루이스’, 혹은 ‘루이스’라고 불려야 맞다.

◇지워진 아버지와 평화의 상징 비둘기=그런데 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 아버지와 피카소의 사이가 무척 안 좋아졌다. 피카소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한물간 그림이나 그린다고 비웃기까지 했다.

그래도 스페인에서 프랑스 파리로 건너온 1900년 이전까지는 작품에 아버지의 성으로 ‘파블로 루이스’로 사인을 했었다. 하지만 프랑스 파리로 와서는 아버지의 성을 빼고 대신 어머니의 성을 사용해 ‘파블로 피카소’라고 사인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도 파블로 피카소라고 말했다. 19살 때부터였다.

혹시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로 박제라는 잔인한 일을 하고, 자신에게도 그 일을 시켰던 아버지를 자신의 인생에서 지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이후로 그는 아버지에게 무심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장례에 맞춰서 가지 않았다. 함께 그림을 그렸지만, 결국 등을 지게 된 슬픈 부자의 이야기다.

피카소가 딸 팔로마와 입맞춤하는 사진, 프랑스 발로히, 1953, 딸의 이름인 스페인어 ‘팔로마’는 비둘기를 의미한다.<출처=historyloversclub.com>

그는 1901년 파리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비둘기를 안고 있는 아이(Child with a Dove)’라는 사랑스러움이 느껴지는 그림도 그렸고, 1954년 마티스가 사망했을 때도 애도의 마음을 담아 작업실 창가에 앉아 지중해를 바라보는 비둘기를 그리기도 했다.

1949년 파리에서 개최되는 ‘세계평화회의’ 홍보 포스터를 제작할 때는 어린 시절에 본 한 마리의 흰색 비둘기를 떠올리며 포스터에 들어갈 이미지를 석판화로 제작했다. 이 포스터는 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다.

이 포스터가 퍼질 때쯤 딸이 태어났는데, 그는 자신의 딸 이름도 비둘기를 뜻하는 스페인어 ‘팔로마’(Paloma)로 지었다. 그리고 1950년에는 평화를 표현하고자 날아오르는 비둘기 판화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피카소는 자유와 평화의 상징으로 자주 비둘기를 그렸다. 그가 그린 비둘기 작품은 아주 많다.

하지만 피카소가 그린 비둘기는 아버지 루이스가 그렸던 비둘기와는 많이 달랐다. 그는 박제된 비둘기를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이 꿈틀거리고 영원히 날아다닐 것 같은 비둘기를 그렸다. 피카소에게 아버지와 박제된 비둘기는 악몽이었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둘기는 그에게 희망이었다. 그는 악몽 속에서도 희망을 그리고 있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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