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 화단을 비롯해 근현대미술사에서는 유난히 남성 미술가들이 중심이 돼 활동한 역사만이 다수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 남성 중심의 단색화 화단에서 추상미술의 불꽃을 피우고, 화려한 꽃처럼 살다간 여성 미술가가 있다.

‘섬들처럼 떠 있는 산들’, 캔버스에 아크릴릭, 73.5×99cm, 개인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여성 추상미술의 기원=1940년 태어난 최욱경은 서울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는 부모님 아래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박래현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는 서울예술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하며, 그야말로 당시 최고의 미술교육을 받고 자랐다.

1963년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 크랜브룩 미술 아카데미(Cranbrook Academy of art)에서 서양화를 공부했고 이후 도자기를 배웠으며, 스코히건 미술학교(Skowhegan school of art) 등을 거쳐 1968년 프랭클린 피어스 대학교(Franklin pierce university)에 재직해 일을 하다 가 1971년 귀국했다.

한국에 귀국한 그는 신세계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72년에 파리비엔날레 출품 작가로 선정되었으며, 1973년에는 미도파 화랑에서 ‘재료의 실험’ 전시를 개최했다. 이후 1974년 다시 미국으로 출국해 로스웰 미술관(Roswell museum and art center)에서 연구비를 받고 1년간 뉴멕시코(New Mexico)에서 레지던시 생활을 하며 그림에 정진했다.

당시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의 영향을 받아 그림에 꽃이 등장했으며, 보다 과감하고 화려한 색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7년 위스콘신 주립대학교(Wisconsin state university)의 교수로 활동하다 귀국해 1979년에는 영남대학교, 1981년부터는 덕성여자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제자를 가르쳤다.

◇색채의 마법사=최욱경은 부모님이 출장을 가면 늘 화구를 사왔다고 한다. 그는 집에서 많은 그림을 그리며 크레파스에서 나는 화학약품 냄새마저도 좋아했다. 아마도 이때부터 화려한 색채 감각을 익혔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던 시기, 한국에서도 앵포르멜이라는 추상미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앵포르멜 미술은 대체로 어두운 색조의 그림이 대부분이다.

최욱경이 색채 추상미술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미국 유학시절부터다. 그가 유학하던 당시 미국은 변혁의 물결이 이는 자유로운 분위기 그 자체였다. 넓은 국가이니만큼 히피 문화를 비롯해 반전, 인종 차별 반대, 인권 운동과 같은 사회적 움직임이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당시 그림 역시 윌렘드 쿠닝이나 마크 로스코 같은 추상 미술가들의 화풍이 주류로 자리 잡고 있었으며, 팝아트도 이 시기에 시작되고 있었다. 최욱경은 역동적인 미국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체화할 수 있었다.

‘무제’, 1966, 종이에 아크릴릭, 42.5×57.5cm, 리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색면 페인팅뿐만 아니라 잉크 드로잉, 꼴라주, 컴바인 페인팅 등 장르와 표현기법에 대한 변용 역시 자유로웠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화려한 색상이다. 다양한 색상을 사용했으나 번잡하지 않고 생동감이 느껴진다. 이러한 특징은 뉴멕시코에서의 레지던시 생활 이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꽃과 산 그리고 바다=조지아 오키프에게 영향을 받아 시작된 꽃과 풀에 대한 탐구는 한국으로 이주한 후에도 산과 바다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됐다.

그는 한국의 민화와 전통문양 등의 요소에 관심을 갖고, 오방색의 화려한 색상을 추구했다. 그의 작품 스케일은 거대해져갔고 조형적 측면에서는 생명력이 넘쳐 흘렀다.

최욱경은 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삶의 자세를 유지했다. 특히 여성으로서의 주체적인 삶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곤 했다. 그리고 스스로 독립적인 삶을 실천했으며, 이러한 태도를 화폭에 솔직하고 열정적으로 그려냈다.

◇최욱경 스타일=최욱경은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생활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모색했다. 또 귀국한 이후에도 당시 한국 미술계의 시류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만의 미술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색채 추상뿐만 아니라 흑백으로 표현한 작품에서도 과감한 필체와 형상들로 견고한 자아의 힘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을 선보였다.

비록 45세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500점이 넘는 그림을 남겼으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표현한 미술가다.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며 불꽃같은 삶을 산 미술가가 남긴 그림은 어떠한 미술사조의 대표 작품이라는 거창한 타이틀보다 그저 ‘최욱경 스타일’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린다. (중기이코노미 객원=김태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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