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다수를 위한 개인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에 부딪혔다. 우리 모두는 그저 안타까운 시대를 한탄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이 힘든 시기의 감정을 배출함으로써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을 뿐이다.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재해 앞에서 힘겹게 버텨내는 우리에게 예술은 잠시나마 공감과 위로, 휴식이 되어주며 그 기능을 다하곤 한다. 필자에게, 퇴근길 우연히 마주한 오슬기의 작품이 그러했다. 녹록지 않은 시대 속에 던져져 그림을 그리는 한 명의 예술가로 존재하고자 글을 써 내려가듯 선으로 이야기를 건네는 작가, 오슬기를 만나보자.

나열 17_161218_2, 112.1×145.5cm, acrylic on canvas, 2019.

Q. 어떤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지, 자신의 작품세계를 소개해달라.

저는 최근에는 ‘나열’이라는 제목의 시리즈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나열 시리즈는 드로잉 기반의 작업들로 작은 종이에 잉크 펜이나 연필로 그린 드로잉들을 모아 캔버스로 옮긴 작품들입니다. 제목이 나열인 이유는 사람들이 단어를 나열해서 문장을 만들듯이 작품을 보는 관객들이 각자만의 방식으로 안에 그려진 요소들을 찾아 상상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목 뒤에 숫자들은 캔버스 작업의 원본 드로잉을 한 날짜로 기록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Q. 작업은 마치 ‘배출’과도 같다고 했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지?

일단 작업이 배출과 같다는 의미는 제가 하는 모든 작업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하는 일상적인 드로잉들은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가지지 않으며 형상을 구체화하지도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찾는 눈, 코, 입들이 어느 날은 유기체로 또 다른 날에는 도형으로 나타납니다. 그날그날 마주한 크기 안에서 조형성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체계적인 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화면 안에 새로운 변수는 존재합니다. 이러한 모든 생각과 과정들이 작업으로 표출되는 것 같습니다.

Q. 원형, 마음의 지도, 분리배출 외 시리즈로 작품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 변화 혹은 진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는지?

2012년부터 2018년까지 ‘원형’이라는 큰 주제를 가지고 대형 작업들을 했었습니다. 선을 끊기지 않게 이어서 그리면서 안에 눈, 코, 입을 찾아 생명체 같은 형상의 드로잉에서 시작된 원형시리즈는 내면과 정신성의 집중으로 반복되는 모양들과 긁어내는 표면이 특징적입니다.

대칭적 이미지와 반복되는 행위에 갇혀있던 자화상과 같은 원형적 표상들은 공간에서 분해, 재조합, 재창조되면서 마음의 지도 시리즈로 연결됩니다. 내면의 원초적 풍경인 마음의 지도 시리즈는 시각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근원적인 내면의식을 저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분리배출 시리즈는 원형이라는 큰 틀 안에서 강박, 반복, 의식화, 해체의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로 버려지는 캔버스의 일부 천 조각들입니다. 완성된 캔버스 천을 자르는 행위는 원초적인 측면보다는 제3자적 시점으로 나와 분리됨을 의미하며 물질적인 측면의 조각은 또다른 배출이 됩니다.

Q. 유화와 아크릴 기반의 작품이 많은데, 시각적으로 봤을 땐 마치 직조된 이미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떻게 자신의 배출을 표현하는 것인지 기법에 대해서도 소개를 부탁한다.

원형 시리즈는 나이프로 긁어서 표면을 만들었던 작품들이라 그렇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기본 바탕에 이미지를 그리고 안에 색을 채운 후 잘 마르지 않는 특징을 지닌 유화물감을 전면에 덮어 나이프로 촘촘하게 긁어냅니다. 마르고 난 후 큰 붓질을 하고 다시 덮어 배경을 닦거나 모양 안을 긁는 것을 반복하면서 밑에 있는 색들이 올라오게 합니다. 이러한 과정들은 ‘반복되는 행위’라는 특징이 있는데, 하루 혹은 이틀 내내 같은 자세로 긁어내는 순간의 집중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마음의 지도(Map of the Soul)6, 193.9×130.3cm, oil and acrylic on canvas, 2015.

Q. 자신의 작품세계가 잘 담긴 대표작을 추천해준다면?

2015년도에 그린 ‘마음의 지도6’ 입니다. 가장 오래 그리고 많이 덮고, 닦고, 긁기를 반복한 작업으로 처음에 채웠던 색들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작품을 보고있으면 그림을 그릴 당시 고민들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 같아서 이러한 마음을 다른 사람들도 느낄 수 있는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것들을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함에 추천하고 싶습니다.

Q. 감상자는 작품을 통해 무엇을 느끼길 원하는가?

제가 작업을 할 때 느꼈던 즐거움, 고단함, 외로움 등과 같은 여러 감정들이 작품을 통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의미를 찾고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품 자체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를 통해 전달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앞으로 어떤 작품을 준비할 계획인가?

최근 예술의 전당에서 ‘청년미술상점’을 진행하면서, 불특정 다수의 감상자들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에서 배운 점은 작품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기억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고있는 나열 시리즈의 드로잉에 관련해 적어둔 글들을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해, 작품을 더 잘 상상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볼 계획입니다.

Q. 작가로서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

배출과 같은 작업들을 지속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앨범 같은 작업들을 하고 싶은 마음에 나름의 분류를 통해 시리즈로 발표하고 있지만 작업에 타당성이 있는지, 존재 이유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Q. 예술가로서, 작가 오슬기의 꿈은 무엇인가?

저의 꿈은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말은 조금 단순하지만 그 안에는 많은 것을 내포합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그리고 싶은 것이 있어야겠지요. 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반과 상황들 역시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감상자가 지나치지 않는 작품의 행위자로 남기 위해 끊임없이 연마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내포한 의미로서 저의 꿈은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김찬용 전시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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