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서울 사대문 안과 인천·경기 지역을 오가며 신나게 자전거 페달을 밟던 소년이 어느덧 70이 훌쩍 넘은 노인이 됐다. ‘밥은 먹을 수 있겠다’는 어른들의 말에 뚝심으로 버텨온 세월만 58년. 우리나라 바둑판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6형제바둑’의 신완식 대표는, 바둑판은 ‘장인정신’이 없으면 절대 만들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비록 30~40년전에 비해 사람들의 관심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바둑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을 위해 옛 방식 그대로 바둑판을 만든다.

신완식 대표가 최고급 비자목 바둑판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바둑판은 여전히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데, 원목마다 그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장인의 손길을 거쳐야만 제대로 된 바둑판이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기이코노미

배곯기 싫어 시작한 ‘바둑’…평생 직업이 되다

1963년 8월20일,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신완식 대표는 고향인 전라남도 곡성을 떠나 무작정 서울로 올아왔다고 한다. 한국 바둑의 개척자로 불리는 조남철 선생과 동서지간이었던 친척을 통해 조남철 선생이 명동에서 기원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자리라도 얻기 위해서였다.

“저 같은 6·25둥이들이 전 세대 통틀어 공부하기 가장 어려웠던 세대였을 겁니다. 우선 밥 먹고사는 게 시급했으니까요. 당시 곡성에서 서울행 완행열차가 320원이었거든요. 여차하면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려고 반 표로 끊어 서울로 올라갔죠. 갈 곳이 없어 기원에서 의자를 붙여놓고 먹고 자며 일했습니다.”

처음에 신 대표가 한 일은 기원 카운터에서 손님을 보며 잔심부름을 하는 것이었다.

“손님마다 바둑만 두니까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공장에서 일이나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마침 조남철 선생님의 친척이 공장을 했거든요. 그곳에서 바둑판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벌써 5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네요.”

공장에서 일하며 가장 신났던 일은 업무가 쉴 새 없이 밀려들었다는 점이었다.

“일하면서 그 해 제작한 바둑판 양을 계속 체크했거든요. 그런데 2배 이상씩 판매량이 늘더라고요. 올해 100개 만들었다면, 그다음 해엔 200개, 또 400개, 800개 이렇게 늘어나니 손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후 1975년 결혼 후 자신만의 업체를 꾸려 자립한 신 대표는 도매를 받아 가던 가게에 직접 자전거로 배달을 나갔다.

“인천, 수원 할 것 없이 모두 자전거로 배달했습니다. 6시간 걸리거든요. 특히 당시에는 자전거를 밀어주던 사람이 있었어요. 독립문의 영천고개, 행당동의 금복시장, 수원의 팔달고개 등에서는 혼자 못 끌고 올라가니까 1원씩 주고 밀어주는 사람을 써가며 배달했죠. 그 덕분인지 지금도 이 나이에 하체 건강은 자신 있답니다.”

13번 공정에 170번 장인 손길이 닿아야 ‘바둑판’

소비자가격이 1억원으로 책정된 본비자 AAA(규격 44×48×21.5) 바둑판. 우리나라 바둑판 중 최고가에 속한다.   ©중기이코노미

바둑판의 공정과정은 크게 건조작업-재단-대패작업-항혈작업-줄긋기-다리부착의 순서로 진행된다. 우선 가장 중요한 작업은 건조다. 건조를 오래 할수록 내구성이 강해지고 변형의 가능성이 적어지는데, 최소 원목을 캔 후 10년 이상 자연건조를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시간을 단축하겠다고 건조실에 넣으면, 나무가 딱딱하게 변해버려 오히려 품질 저하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재단할 때는 나무의 결과 나이테의 각도를 잘 살펴 잘라야 한다. 그래서 나무의 나이가 굉장히 중요하다.

“좋은 품질의 바둑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500년 이상은 돼야 합니다. 나무의 나이가 100~150년이면 나이테의 중심부가 바둑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러면 바둑판이 사방팔방으로 갈라져 버리거든요. 나이테 부분을 버리고 나머지 부분을 재단해 바둑판을 만들어야 결이 제대로 잘 서 육면이 갈라지지 않습니다.”

이후 1차로 기계 대패를 한 후 초벌 대패, 중간 대패, 다듬이 대패의 순서로 세밀하게 대패질해야 한다. 과거에는 이 작업을 모두 기계가 아닌 손으로 했으니 작업자의 손이 남아날 리 없다. 신 대표의 검지 손가락이 굽어진 이유 역시 대패질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바둑판 뒷면 정중앙에 가로, 세로 각 8cm, 깊이 5cm의 크기로 구멍을 깎는 항혈작업을 마친 후 장인이 직접 361개의 줄을 먹을 갈아 완성 시킨다. 요즘에는 가격대에 따라 실크인쇄를 하기도 한다. 바둑판의 기본 외형이 완성되면 다리를 끼운다.

이렇게 바둑판 하나를 만들기까지 총 13번의 공정에 170번의 장인이 손길이 닿아야만 비로소 제대로 된 바둑판이 완성된다. 그래서일까. 바둑판의 가격은 1만원대부터 1억원까지 천차만별이다. 일본에서는 2억엔(약 20억원)을 호가하는 바둑판도 있을 정도다. 신 대표가 처음 바둑 일을 시작하던 1960년대에는 공장가 100원, 소매가 200원이던 바둑판이 지금은 가장 저렴한 가격이 공장가 1만원, 소매가 1만5000원이고, 수억원을 호가하는 바둑판까지 있을 정도니 세월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신 대표가 대패작업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동으로 대패질을 하는 요즘과 달리 예전에는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이뤄졌다.   ©중기이코노미

“1977년에 독립할 때 금호4가에 보증금 10만원, 월세 1만원에 들어갔는데, 얼마 후 청계천 8가에 보증금 40만원, 월세 4만원으로 넓혀 이사를 갔고, 곧이어 중화동에 300만원 전세로 회사를 확장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6형제가 시작한 바둑…‘장인정신’ 하나로 버티다

6형제바둑이 처음부터 형제들이 모여 사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신 대표가 독립 후 명인바둑, 중앙바둑, 형제바둑으로 상호를 바꾸며 회사를 확장해 나갔는데, 명절 때 바쁜 업계 특성상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자 6형제가 모두 모여 일을 도운 것이 계기가 돼 6형제바둑이 됐다. 그때가 1988년이었다.

16남매였던 신 대표는 어린 시절 6명의 형제를 잃었다. 그래서인지 가족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지만, 형제와 함께 사업을 하면서 힘든 고비도 넘겨야 했다고 한다.

“형제 중 2명이 도박을 해서 제 속을 적잖이 썩였었죠. 하루 저녁에 4000만원을 잃을 정도로 큰 사건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가족과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신중히 해야 한다고 조언하곤 한답니다. 특히 직원 마인드가 투철하지 않으면 자칫 사업 방향이 흐트러질 수 있어 주의해야 해요.”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고 막냇동생이 올 2월 퇴직을 하면서 신 대표의 큰 아들인 신동관씨가 본부장직을 물려받았다. 신 대표는 아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이 ‘자재 구입비’다. 현재 환경정책으로 100% 해외에서 난 나무로 만들고 있다. 원래는 우리나라의 피나무, 은행나무로도 바둑판을 만들었지만, 이젠 대부분의 오래된 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어 사용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느티나무가 통이 좋고 얼마나 예쁜지 아세요?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까지 국내 양옥집의 마룻바닥이 전부 느티나무에 합판을 붙여 만든 거랍니다.”

남양주에 위치한 6형제바둑 전경. 반세기 바둑판을 만들어 온 기업답게 건물 외관도 바둑판 모양으로 디자인했다.

“좋은 비자목은 모기도 못 들어올 정도로 구충제 역할을 해요. 바둑판에 사용하면 윤기, 향기는 말할 것도 없고 탄력과 단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죠. 제가 이 비자목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라 생각해요. 일본이 대만을 통해 미얀마산 비자목을 수입했거든요. 그런데 1990년대 일본에 경제위기가 찾아오면서 찾아가지 못한 비자목 1200개를 운이 좋게도 사 올 수 있었어요. 덕분에 현재 자재는 충분한 상태지만,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몰라요. 또 요즘에는 원목으로 들어왔던 재료가 바둑판 모양으로 만들어져서 들어오는 경우도 있어 단가가 올라가기도 하거든요. 항상 이런 상황에 대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6형제바둑은 품질 좋은 바둑판뿐만 아니라 대중이 바둑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바둑 캠프 등을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국영수 과목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기 때문에 예전처럼 바둑에 관심을 두지 않아요. 하지만 바둑은 두뇌활동을 좋게 하고, 인내심과 집중력을 기르기에 아주 좋습니다. 최소 20분 이상은 둬야 하기 때문에 몇 분 안에 끝나는 스마트폰 숏폼 영상과 다르죠.”

1980년대에는 기스가 난 바둑판까지 팔아야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지만, 점점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모습에 아쉬움을 드러내는 신 대표는 제대로 된 바둑판이 만들어지려면 수백년의 세월이 걸리는 것처럼 이런 것에 개의치 않고 ‘장인정신’ 하나로 꿋꿋이 자리를 지키겠다고 말한다.

“바둑분야는 영세업이에요. 심지어 330여명 되는 프로기사도 세계 타이틀을 딴 기사 외에는 먹고 살기 힘들 정도죠.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바둑 인구가 꾸준히 있는 편이거든요. 그런거 보면 아직 희망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만의 기술력으로 세계 최고의 바둑판을 만들기 위해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겁니다.” 중기이코노미 김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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