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초반 한 때 남성들 사이에서 ‘치마 패션’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한 유명 가수가 TV쇼에 나와 바지 위로 살짝 치마를 두른 것이 다였지만, 당시에는 센세이션에 가까운 대중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남성이 치마를 입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일으키는 이들도 있었고, 패션엔 젠더가 없다며 열린 마음으로 대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일단 대중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반대로 여성들 사이에는 톰보이 스타일이 유행했다. 이 스타일은 ‘여성’처럼 옷을 입고 싶지 않은 사람을 위한 것으로, ‘여성이라면 으레 이렇게 입어야지’라는 통념에 따르지 않고 남성처럼 입으며 성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자유로움을 내보이고자 했다.

30여년이 흐른 지금, 사람들의 생각은 계속 열린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생각의 뿌리는 ‘다르다’라는 생각이 자칫 ‘차별’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자신의 기준대로 살아가자라는 성 해방의 요소가 짙다. 이런 측면에서 젠더 프리(Gender-free)를 넘어 젠더 뉴트럴(Gender-neutral)의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눈치 보지 않고 ‘나’를 드러내는 사람들=남녀로 고정시켜 생각하지 않고, 중립적인 사람 자체로 생각해 자신을 표현하는 트렌드의 반영이 사회적 현상으로 일고 있다. 성 역할에 따른 일의 구분과 경계가 무너지면서 개인의 행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자연스레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패션·공연계를 중심으로 일기 시작했지만, 점차 대중문화 전반으로 확대되며 이를 소비하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대중 콘텐츠에서 성별을 교체해 캐스팅하는 젠더 스와프(Gender swap)나, 성의 고정관념을 탈피한 패션인 젠더리스(Genderless)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사회적인 성 역할론에서 탈피하자는 움직임인 젠더 뉴트럴 운동으로 퍼져 나가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공공장소에서 흔히 쓰였던 ‘Ladies and Gentleman’ 대신 ‘Everyone’이라는 성 중립적 표현이 쓰이기 시작했고, ‘남·여’로만 구분돼 있던 화장실에 제3의 성별을 위한 화장실을 별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에 찬성하는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2015년 4월 ‘성 중립 화장실’이 백악관에 설치됐고, 작년 미국 국무부는 제3의 성별을 의미하는 ‘X’를 여권에 표기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 외에도 이미 독일,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아르헨티나 등 11개국에서는 여권에 ‘X’ 혹은 ‘기타(Other)’를 표기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고 있다. 2019년 런던에는 200년 역사를 지닌 올드빅(Old Vic) 극장에 성 중립 화장실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내 대학 최초로 성공회대에 모두의 화장실(Toilet for all)이라는 이름으로 성 중립 화장실이 세워졌다.

남녀로 고정시켜 생각하지 않고, 중립적인 사람 자체로 생각해 자신을 표현하는 트렌드가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미지=이미지투데이>

사실 이같은 젠더 뉴트럴 운동은 ‘차별’로부터 비롯된 경우가 많다. 영·유아 기저귀 교환대 설치 문제,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만, 성 소수자와 ‘유리천장’ 너머에 있는 여성을 위한 사회적 배려는 부족하다는 인식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즉, ‘물리적인 차이는 어쩔 수 없지만, 사회적인 차별은 하지 말자’라는 상대적 약자의 외침에서 파생된 셈이다.

◇일찍이 ‘젠더 뉴트럴’ 눈 뜬 패션·뷰티=고정된 성 인식으로 인한 불합리한 사회적 처사에 저항하고, 타인에게 이것이 잘못됐다는 인식을 알려주기 위한 적극적인 방식은 외형적으로 변화를 주는 것이다. 보이는 것만큼 파장이 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패션이나 뷰티업계에서는 ‘아름다움’과 ‘특별함’이라는 무기를 장착하고, 대중에게 어필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기에 젠더 뉴트럴을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한 측면도 없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MZ세대를 비롯해 성 중립에 찬성하는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고, 일반 대중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먼저, 남성의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구를 건드린 것은 뷰티업계가 처음이었다. 2010년대 ‘그루밍족’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며 ‘화장하는 남자’가 관심을 끌었는데, 당시에는 얼굴의 잡티를 지우고 환하게 보이기 위한 BB크림이나 아이크림을 바르는 정도였다. 하지만, 요즘에는 아이돌의 영향으로 바탕화장뿐만 아니라 눈과 입술에 색조를 넣는 화장품도 흔히 사용된다.

이에 남녀 공용으로 사용 가능한 젠더 뉴트럴 뷰티 브랜드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국내 최초의 젠더 뉴트럴 뷰티 브랜드 라카(Laka)가 지난 3월 내놓은 ‘프루티 글램 틴트’의 경우, 이미 정식 출시 전 자사몰을 통한 선주문 이벤트에서 10만개 이상 누적 판매고를 기록했고, 포털사이트 네이버 쇼핑 색조메이크업 부문 인기 브랜드로 떠올랐다. 최근에는 남녀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아이섀도우 팔레트를 출시해 눈길을 끌고 있다.

남성과 여성을 뚜렷하게 구분 짓는 요소 중 하나는 패션이다. 그 중에서 교복이 차별적 요소가 가장 많이 드러나는 패션으로 꼽혀왔다. 일반적으로 교복 패션은 여학생의 경우 짧은 플레어 스커트에 주름이 잡힌 블라우스와 조끼로 대변됐고, 남학생 교복은 일자 바지에 넥타이와 셔츠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여학생도 편한 바지를 입고 싶다는 의견과 자신의 패션 취향을 존중해 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이에 따라 교육부가 여학생도 교복을 구입할 때 치마와 바지 중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결정했고, 작년 3월에는 시도교육청별 교복 구매요령을 개정했다. 여전히 여학생의 바지 교복 착용에 제한을 두는 학교가 많지만, 적어도 이것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성 인식을 고정화한다는 비판은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주얼리 역시 남성과 여성의 경계가 뚜렷한 분야였지만, 최근에는 젠더 뉴트럴 현상이 강하게 보이고 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에 따르면, 자체 온라인몰 에스아이빌리지의 올 상반기 주얼리 매출은 32% 증가했다. 눈에 띄는 점은 성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인데, 대표적인 품목이 진주 소재와 체인 디자인의 매출 상승이다.

남성용 목걸이로 알려진 체인 디자인은 다양한 굵기의 형태로 제작되며 여성용 목걸이, 팔찌, 귀걸이로 출시되고 있다. 덕분에 100% 리사이클된 도금과 실버를 이용한 제품을 만드는 영국 럭셔리 주얼리 모니카비나더(MONICA VINADER)의 5월 매출은 전년동기 대비 171% 증가했다.

우아한 여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진주목걸이는 남성들의 패션 트렌드로 떠올랐다. 아이돌 가수 송민호의 진주 목걸이 패션이 유행을 이끌었는데, 국내 주얼리 브랜드 먼데이에디션(MONDAY EDITION)의 올 상반기 기준, 진주 소재 목걸이 판매를 보면 남성 고객이 차지하는 구매 비율이 20%를 차지했다. 그만큼 Z세대 사이에서 진주가 그간의 고정관념을 깨고 감각 있는 남성의 스타일링 아이템의 상징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업계는 평가했다. 중기이코노미 김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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