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고물가·고금리’라는 삼중고로 서민경제에 비상등이 켜지면서, 유통가 풍경도 달라졌다. 가격보다는 상품성과 디자인에 집중했던 소비자들이 리퍼브 제품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리퍼브 제품(refurbished product)이란, 기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흠집이 있어 정상가격에 팔기 어려움 제품 혹은 전시된 제품이나 소비자의 단순 변심으로 반품된 제품 등을 새로 단장해 정품보다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구입 후 제 기능을 하지 못할 확률이 높은 중고제품과 달리 제품에 하자가 없다는 면에서 최근 리퍼브 제품을 선택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새 상품 보러 왔다 리퍼브 제품 선택…‘반값’ 가격에 매출 상승세

경기가 불황일 때마다 소비자들은 어쩔 수 없이 소비를 줄여야만 했다. 대표적으로 IMF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에는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자는 의미에서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라는 ‘아나바다 운동’이 유행했다.

최근에는 아나바다 운동에서 한 단계 더 진보한 리퍼브 제품 구매 열기가 뜨겁다. 전 세계를 강타한 인플레이션 여파로 소비심리가 위축됨에 따라 가격 대비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가성비가 소비에서 매우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리퍼브 제품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매장이 전국적으로 늘었고, 코로나19 이후 온라인 쇼핑 비중이 늘면서 반품 제품이 증가함에 따라 리퍼브 시장으로 나오는 제품의 종류와 수도 많아졌다. 그러면서 소비자들은 과거에 비해 다양한 리퍼브 제품을 쉽고, 간편하게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즉, 연일 고공행진 중인 물가로 인해 합리적인 소비를 원하는 고객과 반품이나 재고 물량으로 고민하는 기업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에 리퍼브 시장은 고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유명브랜드의 가구와 가전부터 각종 생활용품 등을 원스톱으로 쇼핑할 수 있는 리퍼브 전문매장인 올랜드아울렛은 작년에 약 1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재고 제품을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는 리씽크는 2019년 100억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지속해서 성장해 작년에는 약 65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스마트폰도 리퍼폰의 성장이 눈에 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2020년 스마트폰 시장은 전년대비 10% 하락했지만, 리퍼폰은 4% 성장했다. 유통업계에서는 전체 리퍼브 시장 규모가 2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대부분의 리퍼브 제품은 온라인의 최저가 제품보다도 30%에서 최고 90% 정도 저렴하고, 정상 제품보다는 평균 30~50% 정도 더 싸다.

올랜드아울렛 파주 본점 가구매장의 한 직원은 “출시 연도, 수량 등에 따라 가격대는 달라진다”며, “대부분 정상가보다 50~60% 저렴하게 팔고, 70% 할인율을 실시하는 제품도 있다”고 말했다.

식품도 리퍼브 상품이 인기다. 소비자는 합리적인 가격에 제품을 사고, 농가에는 추가적인 수익을 얻는다. 환경 측면으로도 음식물 쓰레기 저감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가치소비를 지향하는 소비자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이미지=이미지투데이>

가격뿐만 아니라, A/S 역시 정품과 동일하게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소비자 만족도를 올리는 요인이다. 올 초 한국소비자원이 최근 3년 내 리퍼브 가구를 구매한 소비자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조사에서도, 리퍼브 제품에 대해 대다수 소비자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조사 대상 10명 중 8명은 제품에 대해 ‘만족한다’고 답했고, 70%는 주변에 추천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경기도 포천에서 가구를 판매하는 한 직원은 “일반 새 제품과 리퍼브 제품을 함께 판매하고 있는데, 판매 비율은 동일하다”며, “리퍼브 제품이라 할지라도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의 미세한 스크래치 정도이기 때문에 새 상품을 보러 왔다가도 리퍼브 제품을 구매하는 고객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소파류와 식탁이 잘 나간다”고 덧붙였다.

경기도 부천시에서 리퍼브 가전제품을 판매하는 직원은 “김장철이 다가옴에 따라 김치냉장고가 잘 나간다”며, “정상가 대비 40%나 저렴하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많이 찾고 있다”고 했다.

가계 부담은 줄이면서, 자원순환에도 도움…유통업계 너도나도

지금이야 리퍼브 제품 품목이 세분됐지만, 과거 국내 리퍼브 시장을 이끌어가는 주축은 가구류였다. 그 시작은 2015년 이케아가 고객의 반품 가구를 재판매하는 알뜰코너를 운영하면서부터다.

물론, 이전에도 우리나라에 리퍼브 전문매장이 있긴 했지만, 정상 가구를 판매하던 가구매장에서는 반품된 가구의 경우 전량 폐기가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케아의 알뜰코너에 소비자의 관심이 쏠리자, 국내 가구매장에도 리퍼브 제품을 판매하는 별도의 공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에는 온라인 쇼핑 플랫폼들도 리퍼브 제품 판매에 가세했다. 티몬의 경우 ‘알뜰쇼핑’을 선보이고 있고, 위메프는 ‘중고·리퍼·반품·전시’ 상품 카테고리를 별도로 운영 중이다. 쿠팡은 검색창에서 리퍼나 반품 등을 검색하면 관련 제품을 구매할 수 있고, SSG닷컴도 ‘리퍼브’ 제품을 별도로 판매하고 있다.

식품도 리퍼브 상품이 인기다. 모양이 이상하거나 스크래치가 났다는 이유로 버려진 농산물을 판매하는 리퍼브 식품은 소비자에게는 합리적인 가격에 제품을 살 기회를 제공하고, 농가에는 추가적인 수익을 제공한다. 이뿐만 아니라, 환경 측면으로도 음식물 쓰레기 저감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가치소비를 지향하는 소비자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못난이 과일과 야채를 활용해 샐러드나 디톡스 주스 등을 만들어 판매하는 ‘리퍼브14’ 는 2019년 설립 후 꾸준한 성장세를 기록하며 4곳의 매장을 개업했고, 매출도 2억원에 달한다. 못생긴 채소를 정기 구독 배송서비스하는 ‘어글리어스’는 사업 시작 1년 만에 회원 가입자 수 1만명을 돌파했고, 현재 2만3000명이 넘는 회원 수를 보유하고 있다. 1~2주 간격으로 80여종의 농산물 중 수확 시기에 따라 7~9종을 랜덤으로 고객에게 배달하는 이곳은 시중보다 30% 저렴하게 판매한다.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 마트도 ‘못난이 농산물’을 할인해 판매하고 있다. 이마트는 일반 상품과 동일하지만, 외관에 흠이 있는 B급 상품을 최대 30% 저렴하게 판매 중이며, 홈플러스는 사과·토마토·밀감 등 과일 5종을 ‘맛난이 농산물’이라는 이름으로 팔고 있다. 김장철을 앞둔 요즘에는 일반 무보다 크기가 20~30% 작고, 모양이 덜 예쁜 무 등 농산물 기획전을 운영 중이다. 롯데마트 역시 일반 상품과 비교해 맛과 영향에 차이가 없지만, 크기가 작거나 흠이 있는 B+급 과일과 채소를 시세보다 평균 30%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다.

편의점도 마감 할인경쟁이 치열하다. 세븐일레븐은 지난달부터 전국의 5000여개 점포에서 마감 할인상품 배달서비스를 시작했다. 세븐일레븐이 배달까지 개시한 가장 큰 이유는 2020년 라스트 오더 서비스를 시작한 이래 누적 판매량이 160만개나 될 정도로 인기가 높고, 제품 폐기 절감액은 45억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CU도 유통기한 임박 상품을 최대 70% 할인하는 그린세이브를 운영 중이고, GS25·GS더프레시를 운영하는 GS리테일도 전국의 1만6000여개 매장에서 발생한 유통기한 임박 상품을 할인 판매하는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중기이코노미 김범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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