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도, 생산라인도, 쇼룸도 아닌 자재창고다. 고압세척기 분야 국내시장 점유율 1위 기업 (주)크린피아의 저력은 본사 한편의 자재창고, 그 안에 빼곡히 쟁여진 수억원어치 스페어 부품 하나하나에서 찾기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다. 지난해에야 연매출 100억원을 넘겼다는 중소기업. “수억원어치 스페어 부품은 좀 과하다” 싶을 즈음, 한 술 더 뜨는 이 회사 장병우 대표(50). “수십억원어치를 쌓아둔다”고 태연히 말한다.

“이틀 안에 사후서비스” 진심·자부심의 표현

“저희 크린피아는 수백만원짜리 고압세척기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봅니다. 수백만원을 들여 ‘좋다는’ 크린피아 고압세척기를 샀습니다. 사용자의 부주의건 전기시스템의 문제건 당장 필요한 시점에 이 ‘비싼’ 제품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면, 그걸로 인해 생산이나 출하에 지장이 생긴다면, 고객의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가지 않겠습니까?”

크린피아가 “이틀 이내 사후서비스”를 천명하는 이유다.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의 고객은 2일 이내에 사후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이 원칙은 깨지지 않았다. 서비스도 경쟁력이라는 이 사람들의 신념 덕분에, 지금도 이 회사 자재창고에는 막대한 금액의 스페어 부품이 상시 대기, ‘잠겨’ 있는 셈이다.

(주)크린피아 장병우 대표   ©중기이코노미

크린피아는 국내 산업용 고압세척기 시장의 45~50%를 원천공급한다고 밝힌 바 있다. 국내에서 팔리는 고압분사 건(gun)의 2/3 정도는 크린피아에서 나간다는 것이 장 대표의 귀띔이다. 자칭타칭 세계 최고라는 독일 전동공구업체도, 국내 굴지의 종합상사도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가 고배를 마시고 나갔다. 20년 노하우와 연구개발력보다 이 회사 사람들이 더 ‘결정적’ 원인으로 꼽는 것은 사후서비스 능력이다.

“전국을 단일 서비스 네트워크로 만들었습니다. 판매와 기술서비스를 담당하는 분들에게 적정한 이윤을 보장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숙련된 서비스 담당자가 기술지도도 하고, 요구가 발생하면 최대한 빨리 처리합니다. 기계마다 ‘스티커’가 아닌 ‘명판’ 같은 연락처를 새겨 넣습니다. 기계 자체가 부서지지 않는 한 언제든지 저희 서비스 네트워크에 연결될 수 있습니다”

‘화끈한’ 사후서비스는 자신감의 표현인 경우가 많다. 이 회사는 세계 최고의 평판을 받고 있는 독일 크란즐(Kranzle) 제품을 수입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제조의 외연을 넓혀 왔다. ‘더 많은 이윤’보다 ‘더 적절한 기여’를 목표로 하면서, 산업현장에 필요한 기능과 특성을 차곡차곡 보완해 왔다. 이 회사가 보유한 특허와 실용신안은 그 과정의 부산물이다. 제품에 대한 평판도 좋고, 타깃은 당연히 하이엔드 시장이다.

“가격비교가 무색할 저가 경쟁품들도 많습니다. 이윤만 생각한다면 그 제품 중 하나를 판매할 수도, 동일한 가격대로 경쟁구도를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비자의 신뢰와 맞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믿을만한 제품에 최선의 서비스를 내자, 나머지는 고객에게 맡기자고 다짐했습니다”

여기에도 뒷이야기는 있다. IMF 위기가 오면서 여러 아이템을 다루던 ‘보따리 오퍼상’에서 한 가지 분야에 다걸기를 해야 했다. 당시 고압세척기의 국내 판매가는 도입원가의 3~5배 수준이었다. 이 시장에 매진하면서 마진율을 ‘처절하게’ 낮추기로 했다. 회사도 시장도 함께 날았다. 지난해 매출 100억원을 넘길 때까지, 고압펌프와 고압세척기 등 ‘물장사’ 한길에서 적자 한 번 내지 않았다.

클리엔테스와 파트로네스 그리고 실패하면서 배운다

장 대표는 1995년 서울 양재동에 ‘책상 하나’ 달랑 놓고 사업을 시작했다. 오늘날 크린피아의 전신인 셈이다. 병따개, 지퍼, 모터, 자동차 부품, 고압세척기 등등 ‘돈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가져다 팔았다.

“미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입니다. 당시에도 일에 미쳐 열심히 했습니다만, 재미를 보기도 전에 큰 위기를 맞곤 했습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니 일이 아니라 돈벌이에 미쳤던 겁니다. 그냥 바보처럼 일에만 미치자, 그 때 그렇게 다짐했습니다. 집에 가는 것도 밥먹는 것도 잊고 일만 하기도 했습니다. 크게는 아니지만 조금씩 성과도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즐겨 인용하는 것이 로마의 ‘파트로네스(Patrones)’와 ‘클리엔테스(Clienntes)’ 간에 맺어지는 ‘신의’의 관계다. 크란즐을 비롯한 외국의 사업자와 15년 거래하면서 계약서 한 번 써본 적이 없다. “서류로 공식화하지 않아도 거래상 지위나 신의 같은 것은 그대로 존중했고, 또 그만큼 존중도 받았다”고 회고한다.

크린피아는 ‘이틀 이내 사후서비스’를 천명한다. 때문에 이 회사 자재창고에는 막대한 금액의 스페어 부품이 상시 대기하고 있다.   ©중기이코노미

이것은 직원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MBA 학자금과 시간을 지원하고, 업무와 무관한 분야라도 전액 교육비를 대주고, 진학이나 자격증을 따면 인센티브를 주고, 대학까지 자녀 학자금을 내주고, 전직원이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이 회사가 중소기업에서 보기 드문 복지와 사회공헌을 시행한 것은 ‘함께 길을 걷는 동료’로 눈높이를 맞추기 때문이다.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저희 직원이 실수해서 수천만원의 손실을 보기도 합니다. 이분들을 그냥 도구적 존재로 본다면 속이 쓰리겠지만, 함께 사업을 만들어가는 동료로 본다면 수업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실수나 실패를 만나는 경우에도 진심을 먼저 봅니다. 의도가 적절했는지, 철저하게 반성하고 있는지, 또 많이 배웠는지… 사실 저만 해도 실수나 실패를 통해 더 큰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 동료도 같은 심정이라면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물론 악의적 의도가 개입돼 있거나, 얼토당토않은 핑계로 묻어가려는 경우는 예외입니다”

그가 드는 ‘실패 DB’는 무궁무진하다. “계속 새로운 것 시도해서,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고 동화처럼 말하고 싶지만, 결국엔 성공보다 실패가 훨씬 많았다”고 토로한다. 녹조 제거에 특화됐다는 원심분리기 아이디어에 투자했다가 본 낭패는 애교 수준이다. 선박용 소화설비시스템은 지금까지도 뼈아픈 분야다. 가시와라는 일본 업체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시스템이었다.

“워낙 아이디어와 품질력에 자신 있었으니 마진율을 아주 높게 잡았습니다. 후발주자들에게는 모방하고 따라잡기 쉬운 먹잇감이었겠지요. 발주를 낼 조선업체야 1억원 들일 것 3000만원만 들이면 되니 구미가 당길 일이었고, 저희 입장에서는 특허 같은 방어전략을 세워놓은 것도 아니어서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가품으로 시장을 유린한 업체가 지금은 세계적 강소기업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가끔 분통이 터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돼 버렸다”는 그의 표현에 아쉬움이 잔뜩 묻어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하지만 지난 일, 배운 것이 많았다는 점에 위안을 삼는다.

최선을 다하고 때를 기다리는…‘농부’와 같은 경영자 되길

크린피아의 대표 품목은 여전히 고압세척기다. 성능, 안정성, 내구성 그리고 산업현장별 맞춤기능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Therm’ 시리즈는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보급된 고압세척기다. 산업 전분야에서 이 회사 고압세척기가 톡톡하게 대접받고 있다. 사용 현장의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안전밸브, 자동정지, 모터보호회로 등의 특장점은 20년의 경험과 치열한 사후서비스를 통해 차근차근 구축된 노하우다. 앞서 예로 든, 자금과 조직을 겸비한 대기업들도 쉽게 넘볼 수 없는 수준이다. 물을 고압으로 쏴주는 만큼 용수 사용량을 1/5로 줄일 수 있다는 점은 환경 측면에서도 유리하다. 장 대표는 ‘물장사’의 새 지평으로 고압소화설비를 조준하고 있다.

“화재 장면을 TV로 보여줄 때면 그냥 안타깝습니다. 물만 퍼 나른다고 쉽게 진압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낙산사 화재 같은 문화재 소실은 더 답답합니다. 수백명이 달라붙어 언 발에 오줌 누기 하지 말고, 고압소화설비에 소화액을 섞어 조기에 진화할 수 있다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천에 저희 기계 하나 설치해 놓고 호스를 수킬로미터 이어 붙여 고압으로 물을 쏴주면 또 어떻겠습니까? 관리자 많이 두기 어려운 요양병원 같은 곳에 고압소화설비를 놓고 교육을 시켜 즉각 대응을 하면 또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미 꽤 많은 문화재 시설에서 이 회사 고압소화설비를 들여놓고 있다. 물을 이용한 ‘온도 낮추기’를 넘어 소화액제를 섞어 진화효과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개념이다. 관건은 압력이다. 물과 압력과 펌프의 압력이 동일하게 맞아야 소화액제를 제대로 밀어줄 수 있고, 짧은 시간에 벤추리 효과처럼 쭉 비산시킬 수 있다. 기술력을 확보한 이 회사는 시장이 성숙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관련기관을 발로 뛰며 필요성을 설득해도 돌아오는 답은 “그래서, 지금 어디서 사용되고 있는데?” 정도지만, 조금씩 인식이 개선되고 있다.

“훌륭한 경영자는 겸손하면서도 신념을 잃지 않는 농부와 같다고 했습니다. 제가 위대한 기업을 경영하는 훌륭한 경영자가 될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농부처럼 겸허하게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며 이 회사를 키워나가고 싶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 발을 딛고 선 사람으로서 그냥 ‘살아가는 의미’로 삼고 싶습니다. 먼 훗날 제가 아니더라도 제 동료들이나 사회의 동반자들이 열매를 만끽하도록 거름을 부어주고 싶습니다”

그는 ‘비즈니스의 기본’ 이라는 골프도 배우지 못한 채, 틈날 때마다 밭을 일구는 ‘농부의 시간’이 즐겁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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