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화는 역사적 사실을 그린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 역사화가 세계미술사에서 고귀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진정한 힘은 ‘카이로의 반역자를 용서하는 나폴레옹’, ‘호라티우스의 맹세’, ‘소크라테스의 죽음’ 등 영웅적 인물을 주제로 애국심, 도덕성, 미덕을 강조한 고전적 역사화뿐 아니라 ‘사르다나 팔루스의 죽음’, ‘자유를 이끄는 여인’, ‘키오스 섬의 학살’ 등과 같은 인간이 저지른 참혹했던 죄악이나 정치적 어둠을 고발한 역사화까지 당당하게 포용하는 것에 있다.

낭만주의 태동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의 ‘메두사호의 뗏목’은 1816년 7월2일 국영 이민선이었던 메두사호의 좌초로 겪어야 했던 사람들의 절망적인 순간을 그린 역사화이다. 1819년 살롱전에 출품해 기존 역사화의 관례를 깨뜨려 우파와 좌파의 정치진영에서 비판과 찬사가 엇갈렸지만, 금메달을 받아 제리코를 일약 유명작가로 부상시켜준 작품이다.

당시 프랑스는 신고전주의 화가들이 낭만주의 화가들에 의해 견고했던 위치가 흔들리던 때였다.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작으로 꼽히는 ‘메두사호의 뗏목’이 논쟁의 중심이 된 것도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갈등이 심화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신고전주의 화풍이 이성과 과학적 접근에 의한 엄격한 관찰과 고증, 정확한 데생과 완벽한 화면구성을 중시했던 것과 달리 낭만주의 화풍은 신고전주의가 터부시했던 감성을 중시하며 자유로운 색채와 상상력, 역동적인 화면 구성을 추구했다. 무엇보다 신고전주의가 국가의 영웅이나 위대한 인물을 통해 도덕성을 고양하는 내용을 작품의 주제로 삼은 반면, 낭만주의는 혁명, 학살, 죽음, 폭동 등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喜怒愛樂)을 중시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과감하게 표현했다. 이 점에서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은 강한 극적 대비(빛, 색, 명암), 역동적 인물 구성, 파격적 구도 등 낭만주의 화풍이 추구한 형식과 내용을 엿볼 수 있는 교본적 작품이다.

실제 이 그림은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들라크루아에게 창조적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오늘날 루브르박물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메두사호의 뗏목’의 미술사적 가치는 신고주전의와 대립각을 세웠던 작품이라는 것보다 그림 속 참혹한 장면 뒤에 감춰진 진실이 주는 역사적 교훈에 있다.

절망, 분노, 슬픔, 고통의 13일

‘메두사 호의 뗏목’ 제리코, 1818-19, Oil on canvas, 491x71cm, 루브르박물관, 프랑스

1816년 7월2일 메두사호는 왕당파출신의 귀족 위그 뒤 루와 드 쇼마레이라는 함장을 비롯해 공무원, 의사, 군인, 과학자, 정착민 등 400여명을 태우고 세네갈로 향했다. 항해는 순조로운 듯했지만, 아프리카 해안에서 120km로 떨어진 지점에서 무능력한 함장의 실수로 배가 모래톱에 걸려 좌초되고 말았다.

배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몇 척의 구명보트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차지였고, 부사관, 어부, 민간인들은 구명보트 대신 좌초된 배의 목재로 만든 뗏목에 몸을 실었다. 처음에는 함장이 탔던 구명정과 뗏목을 연결해 해안까지 인도할 계획이었지만, 함장은 뗏목에 연결된 밧줄을 끊어버리고 도망치는 파렴치한 행동을 저질렀다. 함장과 군인, 귀족 등 지배계층이 구명보트를 타고 떠난 바다에 남겨진 149명은 뗏목을 타고 망망대해를 표류하며 구조선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13일 동안의 표류는 인간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또 자연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알게 했다. 가로 15m, 세로 8m의 뗏목에서도 신분과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중앙부위를 차지하고 힘없는 민간인들은 뗏목 가장자리로 밀려나 위험에 노출됐다. 결국 하루만에 20명이 바다에 휩쓸렸고, 일주일 후에는 생존자가 159명에서 30여명으로 줄었다. 날이 거듭될수록 뗏목 위는 안전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으로 살인과 죽음, 공포와 두려움이 난무하는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삶의 희망 대신 죽음에 대한 두려움, 광기, 고통만이 존재했다. 그동안 뗏목을 지휘한 사람은 의사인 앙리 새비니와 지도제작 기술자 꼬레아르였다. 그들은 표류하는 동안 생존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사람을 선별해 바다에 버리고, 죽은 자의 인육으로 갈증과 영양공급을 하는 비인간적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뗏목 위는 인간이 지녀야 할 도덕성과 질서가 파괴되었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귀함은 사라졌다.

표류 312시간이 지난 1816년 7월17일, 가까스로 구조된 사람은 불과 15명뿐이었다. 그 중에서 5명은 상륙 직후 사망했고,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뗏목 위에서 일어난 참혹했던 순간들을 지우지 못하고 정신적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메두사호의 사고가 개인의 탐욕에 눈이 먼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참사로 밝혀지자 무능력한 정부와 관료의 부정부패 실상은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 사건의 경위가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지며 수많은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면 참혹한 사고는 묻혀버렸을 것이다.

제리코의 열정

‘메두사 호의 뗏목’은 제리코가 27살에 메두사 호를 지휘했던 새비니와 꼬레아르가 뗏목에서 겪었던 비극적 상황을 기술한 글을 읽고, 충격을 받아 그린 것이다. 제리코는 이 작품의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 생존자와의 인터뷰는 물론 여러 번의 스케치를 거쳐 당시의 참혹한 순간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실제 뗏목의 생존자는 15명이었지만, 그림 속에서는 20명으로 늘려 죽은 자와 산 자를 대비시키고 관람자가 당시 일어난 무시무시한 공포를 생생하게 공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화실에 메두사호 뗏목을 실제 상황처럼 재현해 죽음 앞에 놓인 사람들의 처절한 심정을 느낀 그대로 담아내고자 열정을 다했다. 심지어 죽은 자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시체 공시소에서 스케치하거나, 시체 일부를 가져와 그리는 광기 어린 행동도 마다치 않았다.

‘메두사호의 뗏목’은 처음 프랑스 미술계의 비판적 시각과 달리 1820년 4월 런던(피칼딜리의 이집트 홀)전시에서 5만명의 관람객을 동원할 정도로 감동과 격찬을 받아 제리코가 이 한 점의 작품에 쏟은 열정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그는 평생 3점의 그림을 선보였고, 32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만, 화가로서 열정은 ‘메두사호의 뗏목’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메두사 호의 뗏목’은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참상을 대형캔버스(491x716cm)에 담아 역사적 교훈으로 삼으려 한 화가의 정신과 프랑스의 역사화가 지닌 고귀한 지위가 허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은 권력과 비리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구해내지는 못했지만, 죄 없이 죽어간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수많은 사람에 의해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변종필 미술평론가(jpda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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