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땅이 굳는다고 했다. 재난을 겪고 그것을 극복해내는 과정에서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는 거라고 배웠다. 적어도 누군가는 그렇게 나아진 세상을 누릴 수 있었기를 바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나아지지 않는다. 고진감래? 위기를 넘겨 숨을 돌릴 만하면 훨씬 더 팍팍해진 세상과 마주해야 한다.

재난 같은 초대형 사태로 사람들이 패닉에 빠지면, 헤게모니를 잡은 쪽에서는 ‘해괴한’ 정책을 서둘러 그리고 강력하게 추진해버린다고 한다. 이런 위기상황의 원인이 자신들의 잘못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도 말이다. 덕분에 평소라면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비상식적이거나 사회적 동의는 꿈도 꾸지 못할 조치들이, 비 온 뒤 독버섯 도드라지듯 불쑥불쑥 자리를 잡고, 많은 경우 주객은 전도되기 십상이다. 결국 재난 그 자체보다 그걸 덮으려는 해괴한 정책이 더 큰 부작용을 잉태하기도 한다. 흔히 이야기하는 재난자본주의 한 단면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세월호 참사는 한국적 재난 자본주의의 한 형태로 기록될 것 같다. 해결 과정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선수(船首)를 돌리다보니, 몸통은 간 데 없고 꼬리에만 정조준한 격이 됐다. 근본적 원인을 따지고 시시비비를 가리고 책임 지울 것은 지우는 규명(糾明)의 단계는 지지부진한데 ‘슬픔의 내면화’ ‘일상으로의 복귀’ 같은 생뚱맞은 수사(修辭)만 기승이다. 근본 원인, 격발 요인, 대응방식의 문제점 등 산더미처럼 쌓인 규명거리는 제쳐두고 재발 막을 대안을 찾자는 목소리만 우렁차다. 급기야 엊그제 선거를 마치고 자신감을 얻은 여당 측에서는 제법 ‘준엄한’ 가르침을 설파하기도 했다. 왠지 ‘반성’이나 ‘조신’이 어울릴 법한 쪽에서 이런 반응이 나오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한예종 이동연 교수는 한국적 재난자본주의의 특성 중 하나로 ‘통치하는 자본주의’를 들었다. 재난이 통치의 위기를 촉발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재난이 통치의 정당성을 강화해주기도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통해 통치자는 재난의 ‘책임’을 통치의 ‘권한’으로 전환시키고, 재난의 해결도 시민사회에 맡기지 않고 자신이 통치를 통해 직접 이뤄내려 한다는 것이다. 여기쯤 되면 익숙한 그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읍소하던 지도자 시절부터, 위기 때는 일사분란 지도자의 목소리에 따라야 한다고 우리는 배워 왔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멸사봉공, 위기를 넘길 때까지는 지도자의 목소리에 통일된 몸짓을 내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 왔다. 그렇게 ‘위기에 강한’ 민족이자 ‘어려울 때 잘 뭉치는’ 민족으로 살아 온 덕분이었을까? 책임을 지겠다더니 덜컥 국가를 ‘개조’하겠다는 지도자, 그런 지도자의 ‘눈물’ 닦기에만 안달인 추종자들이 태연자약 경영하는 나라에 살게 됐다. 그렇게 많은 위기를 함께 넘겨왔는데도 세상의 발톱이 점점 더 그악스러워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을지 모른다. 하나 더. 재난자본주의의 방점은 프롤로그 말고 에필로그다. 의료, 가계부채, 쌀시장… 어딘가에 뇌관은 도사리고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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