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6월 삼성 이건희 회장이 말했다는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이후 20년 남짓 동안 삼성의 매출과 총자산은 십수배, 세전이익과 시가총액은 40배 넘게 뛰었다고 한다. 브랜드파워 상승은 환산이 어렵다. 외국인에게 ‘코리아’나 서울(올림픽·월드컵 같은 스포츠나 천안함·장성택 같은 정치 문제에 신경 안 쓰는 외국인들이 의외로 많다)보다 삼성 전화기나 TV가 더 유명할지 모른다. 애플은 못이겼어도 소니는 제쳤다. 우리 경제도 삼성의 ‘낙수 효과’를 분명히, 일정 부분, 누렸을 것이다. 삼성 덕분에 일정 수의 국민들은 더 윤택해졌고, 그 중 일부는 아마 더 행복해졌을 것이다.

아마 그 즈음부터가 아닌가 싶다. 삼성(과 이건희 회장)은 잊혀질만하면 ‘위기’를 논했다. 이래서 위기, 저래서 위기, 조심하고, 대비하고, 하나를 얻는 순간 또 다른 목표를 조준하고…. 삼성이 책임지고 있는 수십만명의 근로자와 국가경제 비중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바 아니다. 이윤추구가 지고의 목적이어야 할 기업가의 입장을 들여다보면 당연하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삼성이 그러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래서일까? 삼성이 숨을 고르면 온 나라는 ‘스탠드스틸’이 된다. “삼성이 위기라는데…” “삼성도 그렇다는데…” 불만을 제기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20년을 ‘위기의식’과 동거해왔다.

‘법 위의 삼성’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목표의식과 동기부여가 확실한 민간기업의 효율성에 국가기관의 그것이 경쟁하기 쉽지 않다. 더욱이 인간은 ‘나약한’ 존재가 아니던가? 게다가 ‘배제’와 ‘포섭’은 삼성의 장점 중 하나다. 삼성이라면, 공정위 같은 국가기관의 업무를 ‘아날로그’한 방법으로 방해해도 별 문제 없이 지날 수 있었다. 태안 기름유출도 많은 국민의 ‘자원봉사’ 미담을 남기며 큰 탈 없이 넘겼다. 삼성에게는 법도 하나의 ‘공학’(‘과학’이 아니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 삼성만큼 다양한 사회공헌을 ‘의젓’하게 구사해내는 기업은 없다. 회장 일가의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는 행보와 세련되고 유능하다는 구성원의 이미지까지, 삼성은 ‘확실히’ 다르다. 단순히 ‘돈 잘 버는’ 회사가 아니다. 누구에게는 삼성이 ‘표준’이고, 누구에게는 ‘준거집단’, 또 누구에게는 ‘흠결 없는 선(善)’일수도 있겠다. 

그래서 급기야는 일개 기업의 입사전형방식 변경이 엄청난 논란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대학 줄세우기’일 수도, ‘지성의 위기’일 수도, ‘과도한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과열경쟁과 사회적 비용에 대한 고민의 산물’일 수도, 며칠만에 판을 엎은 ‘실패한 대책’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논란을 거치며 오히려 분명해진 것은 예전의 ‘아름다운 시절’이 지나가버렸다는 것이다. 기업이 기업의 영역에만 머물던 시절, “위기”를 무한반복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시절, 기업이 ‘학문’와 ‘지성’의 ‘필요성과 가치’를 (겉으로라도) 존중해주던 시절 말이다. 삼성이 대학별로 할당한 총장추천 쿼터를 거둬들였다 해도, 설사 ‘더 나은’ 입사전형방식을 고안해 낸다 해도, 만에 하나 ‘글로벌 경제위기’가 종료된다 해도 이제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1차세계대전 후에도 파리에 ‘벨 에포크’가 돌아오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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