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갑질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조금이라도 더 센 자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를 이렇게 바꾼대도 전혀 어색할 것 없는 한 해였다.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는 입주민의 갑질을 견디지 못한 경비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 ‘아파트의 명예’를 훼손한 경비원 등은 재계약과 이에 기댄 생존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상아탑 먹이사슬의 맨 윗자리 교수들 중 일부는 동원할 수 있는 대부분의 방법을 통해 학생들을 착취했다. 무보수 부려먹기와 연구결과 가로채기, 연구비 착복에 성추행까지 ‘상상 가능한’ 수단이 총망라된 것으로 보인다.

화룡점정은 대한항공 ‘땅콩회항’이 찍었다. 마흔살 넘은 철부지 ‘로열패밀리’의 헛발질로 촉발된 이 사건은 개인에서 회사로, 그리고는 국토부와 검찰까지 ‘땅따먹기’ 하듯 혐의의 외연을 넓혀가고 있다. 이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대한민국은 갑질공화국이자 힘있는 자를 위해 진화된 정글이라는 약간의 과장에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어진다. 물론 대한민국이 정글은 아니다. 힘깨나 쓰는 야생동물들은 대부분 생존과 번식(육아를 포함한)을 위해서만 악착을 떤다.

납품업체 벗겨 먹고 사는 유통공룡들

2014년, 경제 분야 갑질 논란도 그 어느 해보다 분분했다. 대형마트와 백화점 등 유통공룡들이 납품업체를 대상으로 갑질 선봉에 섰다. 지난 15일 공정위 발표에 따르면, 납품업체들에 대한 국내 유통 공룡들의 전횡은 상상을 초월한다.

롯데마트는 판매촉진행사 비용 16억500만원을 반품업체에 전가시켰다. 롯데 측이 지시한 시식행사 무려 1456회에 동원된 납품업체들이 행사인력 급여, 보험료, 조리기구, 일회용품 등을 부담해야 했다. 이마트는 48개 납품업체에 경쟁업체 홈플러스·롯데마트에서 올리는 매출액과 납품가 공급수량 등의 자료 제출을 강제했다. 현대백화점 역시 새 점포 출점을 앞두고 납품업체들이 롯데·신세계 등 경쟁업체에서 올리는 매출액과 판매수수료율 등을 요구했다.

대형 유통업체의 갑질이 무서운 것은 중소 납품업체들이 ‘반항’할 여력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앞선 11월6일 중소기업중앙회가 발표한 실태조사 결과에 의하면 대형마트에 납품하는 중소기업 중 불공정거래를 당한 중소기업의 55.9%는 “특별한 대응 방법 없이 감내”한다고 응답했다. 문제를 제기할 경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조사대상 49.3.%가 불공정 거래근절을 위해 추진해야 할 대책으로 ‘불공정 거래 신고자에 대한 비밀보장’을 꼽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들이 밝힌 불공정 거래유형으로는 납품단가 부당인하 요구 및 추가비용 부담 요구가 각각 50.0%로 가장 많았다. 아래에서 다룰 납품단가 문제가 여기에 해당한다.

한편 정부는 지난 2011년 대규모유통업법 제정, 판매장려금 부당성 심사지침 제정 등 여러 제도를 내놨다. 중소기업의 불공정 거래 경험은 46.9%에서 11.3%로 감소한 바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판매장려금 부당성 심사지침’시행 이후 납품업체 부담 판매장려금 수는 8.3개에서 2.3개로, 금액은 판매대금 대비 6.5%에서 4.2%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계약서에 판매장려금 결정기준이 반영되지 않았거나(38.7%), 판매 장려금 축소 대신 납품가격을 인하(17.4%)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남양유업 방지법, 어디로 갔나?

대규모유통업법 시행 후 대형마트 불공정거래 대응

<자료=중소기업중앙회>

지난해 5월 터진 남양유업 사태는 전국민의 공분을 산 바 있다. 이 회사 영업사원이 내뱉은 섬뜩한 표현은 대한민국 갑을관계의 현주소를 여과없이 보여주는 민낯이었다. 이후 남양유업은 해당 직원을 해고하고 대표가 나서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회사 혹은 구조적 문제가 아닌 한 개인의 인성 문제로 묻히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법했다. 정치권에서는 불공정 관행을 뿌리뽑기 위한 ‘대리점 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남양유업 방지법) 제정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1년반 가량이 흐른 현재 이 법안은 행방이 묘연하고, 갑질 구태는 여전하다.

서울시가 지난 7일 발표한 ‘유제품 가공본사-대리점 간 불공정거래 현황 실태’ 전수조사 결과에 의하면 ‘정상 판매가 어렵거나 비인기제품을 공급받고, 주문량 이상의 제품구매를 강요받는 밀어내기 관행에 대해서 7.5%가 ‘변함없거나 악화됐다’고 응답했다.

본사가 주문내역에서 제품의 종류나 수량을 임의로 변경하거나 주문내역 관련 서류와 정보 열람을 거부하는 관행에 대해서도 19개 대리점이 ‘변함없거나 악화됐다’고 응답했다. 지난 10월 서울시가 개최한 대리점주 간담회에서 이같은 불공정이 그대로 확인됐다.

납품단가, 올해도 “그저 그래”

한편 중기중앙회가 11월 중순 발표한 대기업 협력 중소제조업체 하도급거래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6%의 업체가 귀책사유 없이 부당하게 하도급대금을 감액당했다고 응답했다. 이 조사에서 46%의 업체가 납품단가가 적정하지 않다고 응답했다. 그나마 현금성결제 비율은 8%포인트, 불공정 하도급거래 개선은 12.3%포인트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납품단가는 상반기에도 여전한 이슈였다. 중기중앙회가 5월26일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2년을 기준으로 최근 2년 동안 재료비·노무비·경비는 5.7~9.0%가 증가한 반면, 납품단가 인상은 0.4~0.8%에 그쳤다. 중소기업의 61.7%가 납품단가가 적정치 않다고 응답해 지난해 같은 조사에 비해 7.7%포인트나 높아졌다.

특히 납품단가 인상요청을 시도한 58.0%의 업체 가운데 38.0%는 원사업자와 합의 도출에 실패해 단가가 동결됐거나, 조정을 거부당해 납품단가 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신공룡의 갑질은 ‘빛의 속도’

최근 10년간 기업메시징사업자의 점유율 추이

<자료=공정위>

기업메시징서비스 시장에서도 LG유플러스와 KT의 갑질이 돋보인 한해였다.  

은행·카드·증권·보험을 비롯한 금융사, 백화점·할인점을 비롯한 유통사, 관공서, 병원 등에서 거래내역·조치내용·향후일정·홍보사항 등을 휴대전화 문자로 통보해 주는 ‘기업메시징서비스’에도 갑질이 횡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1998년부터 중소기업들이 이 시장을 일궜다. 그런데 시장이 커지자 통신대기업들이 뛰어들어 판을 흔들어버렸다. 이들 대기업은 기업메시징서비스의 ‘원료’라 할 무선통신망의 이용요금(건당 평균 9.2원)보다도 싸게 자사의 기업메시징서비스를 판매했다. 이 과정에서 시장을 일궈 온 경쟁 중소사업자들은 고사 위기에 내몰렸다고 아우성이다.

실제 LG유플러스와 KT의 시장점유율은 2006년 29%에서 지난해 71%로 급증한 반면 망을 보유하지 않은 경쟁사업자의 점유율은 2006년 71%에서 지난해 29%로 곤두박질 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달 말, LG유플러스와 KT에 대해 시정명령 및 과징금 총 62억원을 잠정적으로 부과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가입고객에 대한 무선통신망을 독점하고 있는 점을 이용, 기업메시징서비스에 꼭 필요한 무선통신망 이용요금을 자신들이 제공하는 기업메시징서비스 가격에 비해 높게 책정한 혐의가 인정됐다는 것이다. LG유플러스와 KT보다 효율적으로 공급할 기술이나 능력이 있더라도 경쟁사업자들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시장환경이 형성됐다는 것이 공정위의 판단이었다.

시장이 이미 초토화되고 일부 업체들은 도태된 상황에서 이 시장에 대한 향후 전망을 섣불리 내리기 힘든 상황이다. 더욱이 최종 의결서 결과에 따라 KT와 LG유플러스 모두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내비친 터라 이 문제는 내년 상반기에 재점화될 공산이 크다.

‘을질’이라 부르리까? 비정한 먹이사슬

‘갑’이 ‘상대적’ 존재라는 점은 갑질을 확대재생산한다. 현대·기아자동차의 1차 협력업체이자 연매출 3조원대 대기업의 계열사인 아산성우하이텍은 2차 협력업체의 납품대금을 제멋대로 깎는 등 횡포를 부리다 공정위에 적발됐다. 공정위는 지난 4월 이 회사가 하도급업체에 대해 부당감액, 서류 미보존, 수령증명서 미발급 등의 하도급법 위반행위를 한 것을 확인하고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2억2600만원을 부과한 바 있다. 단가후려치기 등 ‘갑의 횡포’가 협력업체들 사이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공정위는 같은 시기 한국GM 자동차의 운탁송 업무를 전담하는 DKL 역시 하도급 업체에게 거래상 지위를 남용한 사실을 잡아냈다고 밝혔다. 수급 사업자와 하도급계약서 등을 설정 또는 변경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불리한 거래조건을 일방적으로 설정하거나 변경한 것이 확인됐다. 변경된 거래조건에 동의하지 않은 수급사업자의 추가 협의 요청을 거부한 것도 확인됐다. 하도급 위탁일, 위탁 목적물, 목적물의 납품시기 및 장소, 하도급 대금과 지급방법 및 시기 등 법정 기재사항을 적은 서면을 발급해주지 않고 수급사업자에게 일을 맡겨오다가 5개월이 지나서야 관련 내용이 담긴 하도급 계약서를 발급하고, 계약서의 효력 시기를 일방적으로 소급시켜 시행하기도 했다.

이같은 일은 삼성전자 협력업체 간에도 있었다. 수원지검 안산지청은  지난 8월초 납품 편의를 봐달라며 금품을 주고받은 혐의로 삼성전자 2차 협력업체 대표 등을 구속기소했다. 이 사람은 또 2011년께 당시 삼성전자 부장이던 B씨에게 “1차 협력업체에 우리 제품을 많이 납품할 수 있도록 얘기 잘 해달라”며 1억원을 건넨 혐의도 받고 있다. 3차 업체는 2차, 2차 업체는 1차 업체 대표나 납품 담당 직원들에게 1000만~8억원까지 총 17억원의 금품을 주고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갑은 을에게, 을은 병에게, 병은 정에게. 이렇게 갑질은 무한반복되는 것이다.

<저작권자 ⓒ 중기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