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정과제로 추진중인 소비자권익증진기금 설립을 놓고 공정거래위원회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미묘한 온도차를 보이고 있다.

공정위가 소비자 역량 강화를 위한 기금을 구상하고 있다면, 한국개발연구원은 소비자들의 소송까지 지원하는 보다 광범위한 형태를 제안하고 있다.

소비자권익증진기금은 소비자 교육, 소비자문제 연구 등을 위해 정부가 국정과제로 선정, 설립을 추진 중인 기금이다. 지난해 12월30일 이운룡 새누리당 의원이 기획재정부와 소비자단체의 협의를 거쳐 기금 설립을 골자로 한 소비자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한국개발연구원 천규승 박사는 9일 이운룡 의원이 주최한 소비자권익증진기금 관련 정책토론회에서 이 기금이 소비자 정보 제공, 소비자 교육, 소비자 문제에 관한 연구 및 조사, 소비자 피해 구제 등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소비자 피해 구제의 역할을 강조했다. 천 박사는 “소비자 피해 구제는 소비자권익증진기금 발의의 시발점으로, 빼놓을 수 없는 과제”라며 “소비자 피해는 복합적인 원인이 내포돼 있는 경우가 많다. 기금에서 소비자문제 상담, 합의권고, 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한 분쟁 조정, 민사소송 지원 등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본다”고 말했다.

반면 공정위는 소비자 피해 구제보다는 소비자역량 강화에 중점을 두자는 입장이다. 소비자 정보지인 미국의 컨슈머리포트(Consumer Reports)나 영국의 위치(Which)처럼 상품을 비교·분석하는 정보제공 사업에 방점을 찍자는 것이다. 

공정위 장덕진 소비자정책국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소비자권익증진기금에 의한 피해자 구제는 피해를 유발한 행위자가 배상을 한다는 원칙에 위배되며 타 분야와의 형평성, 해외사례 등을 감안했을 때 곤란하다”면서 “소비자상담, 분쟁조정제도 운영 지원 등의 방식을 통해 간접적으로는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재원 마련에도 입장차가 감지된다. 천규승 박사의 계산에 따르면 기금의 연간 필요 예산은 약 200억원 규모다. 공정위가 공정거래법 위반 기업으로부터 징수한 과징금은 2013년 기준 연간 3329억원. 이 중 일정액만 확보해도 초기 기금을 운영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천 박사는 “공정위의 과징금 수입을 기금에 일정 비율로 투입하면 상당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면서도 “(과징금에) 손을 대면 좋겠으나 (공정)당국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공정위의 재원 마련 안에 과징금 부분은 빠져있다.

매년 공정위 과징금이 일정치 않아 안정적인 재원으로 활용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의견도 있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제출받은 과징금 세입 실적 자료에 따르면 2010년 5074억원, 2011년 3473억원, 2012년 9115억원, 2013년 3329억의 과징금이 징수됐다. 

소비자권익증진기금의 수익모델은 소비자정보 유료서비스다. 컨슈머리포트나 위치처럼 질 높은 유료 정보를 주기적으로 제공할 경우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천 박사에 따르면 각국 소비자 정보 매체의 구독자 수는 미국 컨슈머리포트가 800만명, 영국의 위치가 138만2000명, 독일의 테스트가 59만8000명이다. 

한국에도 유사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공정위가 운영하고 한국소비자원과 소비자단체가 정보를 생산하는 소비자종합 정보망인 스마트컨슈머(www.smartconsumer.go.kr)가 구축돼 있는 상태다. 그러나 천 박사는 이에 대해 “상대적으로 고가의 의류나 가전제품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기본 정보와 평가 방법만 제시할 뿐 제품별 품질 지표나 내구성 등에 대한 정보는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기금 운영 주체는 정부, 민간, 민관합동 등이 거론되는 가운데 민관합동 방식이 유력하다.

천 박사는 “민간으로만 운영되면 설립 취지에 부합되지 않는 방향으로 운영될 소지가 높고, 정부만 주체가 될 경우 민간 참여가 제한되고 국가 재정부담이 늘어날 우려가 있다”면서 “민관 합동기구로 운영하면 기금 운용에서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정위 장덕진 소비자정책국장도 “민간기금의 형태로 추진하되 기금의 공정한 운영을 위해 민관합동으로 구성된 재단이사회가 기금의 주요 의사결정을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자로 참석한 권대우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금의 재원조달과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는 국회나 지방의회의 개입과 감독도 필요하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