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전자금융사기 ‘파밍’이었다. 사기 일당은 A씨 컴퓨터에 악성코드를 심어 제대로 된 인터넷뱅킹 주소를 입력해도 허위 사이트로 연결되도록 만들었다. 진짜 은행사이트와 똑같아 일반인들은 결코 알아챌 수 없는 ‘정교한 짝퉁’이다. A씨는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경찰이 범인을 잡지 못하자 A씨는 은행 측에 손해를 배상하라며 소송을 냈다. 전자금융거래법 9조 1항, “금융회사 또는 전자금융업자는 사고로 인해 이용자에게 손해가 발생한 경우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진다”는 조항에 의거해서였다. 지난 1월15일 서울중앙지법은 은행의 책임을 20%까지만 인정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은행 책임을 일부 인정하는 이 판결은 전자금융거래법에서 의미 있는 판결로 거론된다. 비록 20%이기는 하나 전자금융사기에서 금융사의 책임을 인정한 사례가 전무했던 탓이다. 금융감독원 소비자보호처에 따르면 지난 2012년 1월부터 2013년 7월까지 금융사 상대 소송에서 전자금융사기 피해자가 승소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확정판결이 나온 51건 중 49건에서 금융소비자가 패소했다. 나머지 2건 역시 화해권고를 통해 금융회사가 손해액의 40%를 배상한 경우였다.

분명 법문에는 소비자에게 손실이 발생했을 경우 금융사가 손해를 배상하도록 명시하고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법문과 현실의 괴리는 전자금융거래법 9조 2항에서 기인한다. 금융사의 면책사항을 규정한 2항에는 사고 과정에서 이용자의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 금융사가 책임의 일부 또는 전부를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고 적혀있다. 여기서 ‘중대한 과실’이라는 애매모호한 문구가 문제다. 최근 판례를 보면 법원은 이용자의 중대 과실을 폭넓게 해석해 금융사들은 사고 책임으로부터 피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금융사기 유형을 피해자가 직접 밝혀내야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당한 피해가 접근매체(공인인증서· 비밀번호 등)의 위·변조로 발생한 것인지, 정보통신망 침입에 의한 것인지 등을 증명해야만 금융사에 책임을 물릴 수 있다. 금융사기 수법이 발전하면서 어떤 유형에 의한 사기인지 밝혀낼 수 없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지난해 농협에서 텔레뱅킹을 통한 1억2000만원 인출사고는 은행도 금융당국도 어떤 수법인지 밝혀내지 못한 상태다. 그럼에도 피해자가 은행으로부터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범죄 수법을 증명해내야만 한다. 금융당국도 밝혀내지 못한 범죄 수법을 피해자가 알아내야만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아이러니다.

이같은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한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이 최근 국회에 발의됐다. 금융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소비자가 아닌 금융사가 입증하도록 변경하자는 것이 골자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환영할만한 조치다. 정보나 금전적 여건이 부족한 소비자와 금융사가 법정 다툼을 벌이는 것 자체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인데 그동안 소비자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워왔기 때문이다. 금융당국도 핀테크를 활성화한다며 규제 완화만을 외칠 것이 아니라 전자금융 발달로 소비자들에 생길 피해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