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아이핀시스템에서 75만건의 아이핀이 부정발급되는 사고는 언뜻 보면 행정자치부의 무능에서 기인한 사태로 파악된다. 하지만 상세히 뜯어보면, 아이핀 제도 자체가 갖는 한계가 드러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주민번호 수집 제한을 강화한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지만 그 대안으로 아이핀을 도입하자, 기존의 문제점이 똑같이 발생해버린 것이다.
‘행자부의 무능’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이번 사태가 ‘공공아이핀’에 한해서만 발생했기 때문이다. 지난 5일 행자부는 공공아이핀 75만건의 부정발급 사건을 공개하면서 “민간아이핀의 경우에는 이번 사고와 같은 부정발급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아이핀은 발급받는 기관에 따라 공공아이핀과 민간아이핀으로 나뉘지만, 기능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인터넷 사용자들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서울신용평가정보나 나이스신용평가정보, 코리아 크레딧뷰로 등 민간아이핀 발급업체에서 아이핀을 발급받을 수 있다. 또는 행자부가 이용하는 공공아이핀센터에서 발급받을 수도 있다. 민간 사이트에서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는데 유독 공공아이핀센터에서만 부정발급이 발생했으니, 행자부의 무능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후속대응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2월28일 0시30분부터 3월2일 오전 9시 사이에 부정발급된 아이핀 중 12만건이 3개 게임사이트의 신규 회원가입이나 기존 이용자 계정 수정·변경에 이용된 사실을 파악한 행자부는 민간아이핀기관과 관련 게임사에 이 사실을 통보해 임시 사용중지 조치 등을 취했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에게 어떠한 통보도 없었다는 사실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경찰청에 수사요청을 하고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여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었지만, 정작 피해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문제점일 뿐이다. 문제의 근본은 아이핀 자체에 있다. 주민번호를 불필요하게 수집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개인정보 유출과 피해를 방지하자는 게 아이핀의 도입 목적이지만, 아이핀 자체가 주민번호와 같은 만능키 역할을 해버리면 주민번호의 무분별한 수집 시와 마찬가지 문제를 발생시킬 뿐이다.
시민단체인 진보네트워크는 5일 성명을 통해 “아이핀은 인터넷에서의 불필요한 본인확인을 촉진하는 제도”라며 “아이핀이 유출되면, 이용자가 가입한 여러 사이트가 한꺼번에 뚫리게 되고, 이 때문에 아이핀 역시 해커들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해외 주요 사이트들은 본인확인 없이도 운영이 되고 있는데, 유독 한국에서만 본인확인을 요구하고 있다”는 지적과 “애초에 아이핀이 도입되지 않았다면, 나아가 불필요한 본인확인 자체가 없다면, 이에 따른 해킹이나 개인정보 유출, 명의 도용 사고 등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해법도 제시했다.
개인정보보호법을 강화해 불필요한 주민번호 수집을 제한한 것은 올바른 방향이다. 그러나 주민번호를 대체할 또다른 인증수단을 도입하는 것은 문제의 반복일 따름이라는게 진보네트워크의 설명이다. 아이핀시스템의 전면 폐기를 지금부터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매몰비용을 아까워하다가는 더 큰 손해를 입게 된다는 콩코드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검토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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