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글로벌 환율 전망과 우리기업의 대응방안 세미나가 열렸다.   ©중기이코노미

반도체 제조기계를 만드는 A기업은 최근 저렴해진 일본산 기계와 경쟁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이 기업은 중국시장에서 일본 업체의 저가 공세에 밀리면서 수출물량이 수출컨테이너로 20% 가량 줄었다. A기업은 “지금으로선 바이어들에게 일본처럼 가격을 깎아주는 수밖엔 방법이 없다”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금속을 생산하는 중견기업 B도 엔저 이후 수출에 빨간불이 켜졌다. 최근 유럽시장에서 일본이 낮은 가격으로 치고 들어오면서 입지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B기업은 “한번 점유율을 빼앗기면 회복이 어렵기 때문에 물량을 줄일 수가 없다”며 “팔수록 손해 보는 장사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라고 말했다. 

엔저에 따른 일본기업의 저가 공세로 한국 수출기업들의 고통이 커지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일본에 수출중이거나 해외시장에서 일본과 경합을 벌이고 있는 수출기업 30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엔저로 인해 수출에 피해를 입었다는 기업이 절반 이상(55.7%)을 차지했다. 이중 큰 피해를 입었다는 기업은 21.0%였으며, 약간 피해를 입었다는 응답은 34.7%로 조사됐다. 거의 피해가 없거나(36.7%) 전혀 피해가 없다(7.7%)는 기업은 44.4%로 나타났다. 

엔저로 인해 수출에 피해를 입었는가

조사기간: 2015년 4월27일부터 5월6일까지. 조사대상: 전국 수출업체 300개사 <자료=대한상공회의소>   ©중기이코노미

그러나 위 사례에서도 보듯 기업들은 엔저 현상에 별다른 대응책을 찾지 못한 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수출을 이어가고 있다. 실제 대한상의 조사에 따르면,엔저 현상에 대한 대응방안을 묻는 질문에 10곳 중 7곳은 마련하지 못했다(69.7%)고 답했다. 마련한 기업은 12.0%에 그쳤고, 18.3%는 계획 중이라고 답했다.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이유를 복수응답으로 조사해 보니, 대외경제환경의 불확실성이 60.8%로 가장 높았다. 이어 일시적 현상이란 생각(16.7%), 해외시장 정보 부족(15.3%), 전문인력 확보 어려움(9.1%) 순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엔저가 단기적인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23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글로벌 환율 전망과 우리기업의 대응방안 세미나에서 오정근 아시아금융학회장은 “지난 11일 한국은행의 금리인하로 원엔 환율이 909.74원까지 움직였으나 19일 이후 다시 큰 폭으로 떨어져 현재 900원을 하회하고 있다”며 “최근 일본의 실질임금이 증가세로 전환되는 등 일본 실물경제가 살아나고 있지만, 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어 이같은 엔저현상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고 분석했다. 아베 총리가 정치적 승부수로써 내년에 다시 한 번 추가 통화완화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전승지 삼성물산 책임연구위원 역시 “현재 엔화가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어 아베 정권이 계속해서 돈을 ‘들이붓는’ 액션을 취하기 부담스런 상황인 것은 사실이다”면서도 “그러나 이제 환율경쟁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일본은행(BOJ)이 돈을 찍어내는 양적완화를 계속할 명분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전 연구위원은 특히 “일본 경기가 회복세처럼 보이는 것은 일본이 수출금액을 엔화로 표시해 발생하는 착시효과”라며 “이를 달러화로 바꿔보면 지난 1~4월 일본의 수출증가율은 -6.3%로 한국(-4.3%)보다 낮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또 “국제유가가 급락하면서 BOJ가 내년까지 약속한 물가상승률 2% 달성 목표도 현재로선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정치권에선 표면적인 성과를 위해서라도 추가로 양적완화를 추진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업종별 원/엔환율 감내수준

<자료=대한상공회의소>

특히 이들 기업은 수출경합중인 일본 제품의 가격이 10% 낮아진다면 수출물량이 평균 11.7% 감소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업종별로는 음식료(18.7%)의 감소량이 가장 컸고, 이어 ▲철강(15.1%) ▲조선·기자재(13.3%) ▲자동차·부품(12.4%) ▲유화(10.6%) ▲기계(9.2%) ▲정보통신·가전(9.2%) ▲섬유(9.1%) ▲반도체(8.1%) 순으로 나타났다. 

전수봉 대한상의 경제조사본부장은 “일본이 수출진흥, 수입제한, 자국화폐 평가절하 등의 방법으로 다른 나라 경제를 희생시키면서 자기나라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근린궁핍화정책’(beggar my neighbor policy)을 펼쳐 우리기업의 숨통이 죄어들고 있다”며 “과거 엔고시대를 이겨낸 일본기업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원고시대를 헤쳐 나가기 위해 사업구조를 효율화하고 제품의 부가가치를 향상시키는 등 경쟁력 제고에 주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날 세미나에선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대응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수동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대기업들은 글로벌 아웃소싱을 늘리고 생산시설을 해외로 이전하는 등 채산성이 약화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고 있지만 중소기업들은 수출단가를 인상하거나 내수 판매 비중을 높이는 등 외에는 뾰족한 대처방안을 찾지 못하는 실정”이라며, “정부가 환율 하락 속도가 지나치지 않도록 관리해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설문에서 복수응답으로 조사한 엔저시대 정부가 추진해야할 정책과제에서 기업들은 환 위험관리 지원(52.3%)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수출기업 금융지원 강화(44.0%) ▲투자지원 확대(33.0%) ▲비용절감 지원(20.7%) ▲해외 전시회·마케팅지원 강화(18.0%) ▲법인실효세율 유지(7.0%)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경제협력 추진(5.0%) 등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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