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적 보수를 표방하는 국가미래연구원과 재벌개혁을 주장해 온 경제개혁연구소·경제개혁연대가 재벌개혁을 주제로 머리를 맞댔다. 보수와 진보 양측 모두 현재 한국의 재벌기업 중심의 문화에 개선이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경제문제에 접근할 때 기존의 맹목적인 진영 논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주문도 나왔다. 

국가미래연구원의 추천으로 발제를 맡은 신광식 연세대 경제대학원 겸임교수는 30일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재벌개혁 토론회에서 “한국은 1965~1990년에 고속 성장을 하면서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현재의 재벌들은 산업화와 경제성장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제했다. 

산업화를 이룬 뒤 우리 경제는 저성장과 양극화 문제에 부딪혔다. 신광식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실질 경제성장률은 2008년 이래 3% 미만을 유지하고 있으며, 부와 소득불평등은 점차 커지고 있다. 지난 2012년 통계청이 발표한 가처분소득 기준 지니계수는 0.353이었던 점 등을 근거로 들며 “한국은 OECD국가 중 5~6번째로 소득 불평등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경제시스템은 엘리트 이익에만 도움을 주며, 국민들은 대부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도 했다. 신 교수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계층 상승은 물론이고 현상유지조차 어렵다면 경제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 성장 단계에서 뿌리 깊게 자리한 정경유착 문제도 거론했다. 정부가 강력한 산업정책으로 재벌 기업들을 육성하는 과정에서 정치인과 재벌이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보상을 제공해 왔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범법 기업인들에 대한 정치권의 가석방이다. 총수일가의 내부거래를 통한 사익편취, 편법 증여와 상속, 탈세, 횡령, 배임, 내부자거래, 주가조작, 회계분식 등 각종 비윤리적 행위를 일삼은 재벌에 대해서도 가석방이라는 관대함을 베푼다는 지적이다.

신 교수는 “시장규칙과 규범의 정립이라는 본연의 임무는 제켜둔 채 비리 기업인들의 가석방과 사면을 주장하는 것이 우리 정치의 단면”이라면서 “한국에는 익숙한 이 면죄부 논리가 보수 경제지인 월스트리트 저널에는 ‘비리 총수들이 경영하게 해야 경제가 잘 된다는 이상한 논리(odd reasoning)’로 보일뿐”이라고 해외 언론의 보도를 언급했다. 

이같은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시장경제의 윤리와 법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신 교수는 “정치와 경제권력의 연계는 법치의 실패를 초래했고, 이는 시장경제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정직보다는 위법, 기회주의, 도덕적 해이를 일삼는 것이 기업들에게 더 유리한 환경”이라며 “시장과 기업의 윤리를 향상시킬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꼬집었다.

경제개혁연대의 김상조 소장은 재벌 내 양극화 문제를 거론했다. 삼성, 현대, LG, SK 등 4대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30대 재벌의 자산총액인 1295조원을 100%로 놓고 봤을 때 4대 재벌의 자산 총액은 전체의 52%(2012년 기준)였다. 삼성에서 파생된 그룹인 신세계, CJ와 현대에서 파생된 현대백화점 등을 합친 ‘범 4대 재벌’의 자산 총액은 68.5%에 달했다. 한국 경제는 30개 가문이 아니라 4개 가문 소속 그룹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것이 김 소장의 말이다.

이처럼 재벌 안에서도 빈익빈 부익부가 두드러지고 있으나 공정당국은 자산 5조원 이상인 대규모 기업집단을 하나의 규제망에서 관리하고 있다. 김 소장은 “대규모 기업집단들도 구체적인 상황은 제각각이다. (4대 그룹을 제외한) 상당수 재벌들은 심각한 구조조정을 요하는 부실기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면서 “4대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기 위한 행정규제는 여타 재벌들의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킬 수 있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지적했다.

진보진영의 재벌개혁 운동에 한계가 있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신광식 교수는 진보 진영이 친시장과 친기업을 혼동하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진보 논객들은 경쟁제한 규제를 철폐하는 시장 친화적인 주장을 친재벌 논리로 치부한다”면서 “시장의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정책을 찾기 보다는 반시장적 규제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김상조 소장도 진보 진영의 한계를 지적했다. 김 소장은 “한국사회의 보수와 진보는 진영논리를 확대 재생산하는 악순환에서 탈출해야 한다. 이는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지만 진보 경제학자로서 특히 진보진영이 심사숙고하기를 기대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김 소장은 “한국의 진보진영은 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보수정권일 때는 물론이고 진보정권일 때도 그랬다”면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만으로는 시장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 소장은 “보수와 진보 진영은 상대편의 논리에 대해서는 날선 비판을 가하면서도 같은 편의 논리상 허점에 대해서는 관대한 모습을 보이고, 토론과 비판을 사실상 금기시하고 있다”면서 “시장경제와 민주질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진영 간 토론뿐 아니라 진영 내부의 토론도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